75년 동안 끈끈한 동업자 관계를 이어오던 영풍·고려아연 그룹이 마침내 파국으로 치닫는 모양새다. 이미 지난 3월에 열린 주주총회를 앞두고도 최씨 가문과 장씨 가문은 사사건건 충돌을 겪어왔지만, ‘공동 소유와 공동 경영’이라는 기본 틀을 무너뜨릴 만큼은 아니었다. 지난 주총에서 충돌했던 정관 변경과 배당 문제는 결국 파국의 전조에 지나지 않았다. 주총이 끝나자마자 최씨 가문 주도로 서린상사 경영진을 교체하더니 고려아연이 영풍과 함께 사용하던 논현동 사옥을 떠나 종로로 이전하는 등 일반적인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심상찮은 일들이 일사천리로 빠르게 진행됐다.
영풍을 경영해 온 장씨 가문은 가뜩이나 실적 부진에서 헤어나지 못한 데다 석포제련소에서 빈발하는 근로자 재해 사망 사고 등으로 대표이사가 구속되는 등 온갖 악재에 내몰린 끝에 최씨 가문과의 동업자 관계마저 파탄지경에 내몰리자 ‘적대적 M&A’라는 최종 병기를 꺼내 들고 나섰다. 75년 동안 가장 모범적인 동업 관계라고 재계에서 널리 칭송받아 왔으며, 심지어 가족보다 더 단단한 결속 관계를 유지해 왔던 최씨 가문과 장씨 가문의 관계가 하루아침에 이토록 적대적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영풍·고려아연 그룹이 장구한 세월 동안 ‘공동 소유 및 공동 경영’ 기조를 굳건하게 유지해 온 이유는 그룹 내에서 가장 핵심적인 기업인 고려아연의 지분 구조가 현상 변경이 불가능하다는 확고한 인식 때문이었다. 장씨 가문이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주)영풍이 고려아연의 지분을 32% 가까이 보유해 왔을 뿐만 아니라, 최씨 가문이 보유 중인 고려아연 지분은 장씨 가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낮았기 때문이다. 고려아연의 시가총액 또한 10조원을 훌쩍 뛰어넘을 만큼 덩치가 크게 불어나서 최씨 가문으로서는 거대 자본을 백기사로 끌어들이지 않는 한 장씨 가문과의 지분 경쟁마저 이겨내고 고려아연을 차지할 방법이 없어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고려아연과 영풍이 무려 75년이라는 세월 동안 단단한 동업자 관계를 유지해 오다가 최근 급작스럽게 경영권 분쟁에 돌입한 까닭은 무엇일까. 외견상으로는 고려아연의 미래 신사업 진출을 둘러싼 두 가문 사이의 견해 차이 때문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더 이상 공존하기 힘들 만큼 동업 관계가 너무 오래 지속되면서 ‘참을 수 없는 분리 욕구’가 급작스럽게 분출된 것에 가깝다.
비철금속 제련 일변도였던 고려아연의 경영권이 창업 3세인 최윤범 회장으로 넘어간 시점부터 고려아연은 과감한 변화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40대의 젊은 나이에 고려아연을 떠맡은 최윤범 회장은 부임 직후부터 50년 이상 집중해 온 ‘금속 제련 사업’ 일변도에서 과감하게 탈피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그린 수소를 포함하는 신재생 에너지, 니켈 제련을 비롯한 2차전지 소재산업, 자원 리사이클링 등 미래 신성장 사업 분야에 발 빠르게 진출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다양한 사업 파트너들과 손을 맞잡고 대규모 자본을 유치하기에 이르렀다.
일련의 자본 유치 과정이 결국 최씨 가문의 지배력 강화 목적으로 진행된다고 판단한 영풍 측이 뒤늦게 고려아연의 행보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고 나서자, 고려아연의 이사회를 장악한 최씨 가문에서 우호적인 백기사들을 대거 끌어들이면서 지분 확보 경쟁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현재 고려아연의 지분 구도만 살펴보더라도 최윤범 회장 취임 이후 얼마나 많은 기업이 고려아연의 지분 경쟁에 동참했는지를 금세 알 수 있을 정도다. 결국 고려아연 경영진에 맞서 홀로 대항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장씨 가문에서 MBK파트너스라는 사모펀드와 손잡고 최씨 가문을 향해 적대적인 M&A를 선언하는 최악의 국면에 다다른 셈이다.
이제 시장의 관심은 온통 거대 자본끼리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진검승부의 결과에만 집중되는 형국이다. MBK파트너스라는 거대 투기 자본과 손잡은 영풍이 이번 공개매수에 성공한다면 그동안 고려아연의 기술 개발과 경영을 도맡아온 최씨 가문의 경영진은 하루아침에 기업 경영에서 쫓겨나고 고려아연과 영풍정밀 등 계열사의 지배권을 상실할 가능성이 크다. 비록 고려아연에 대한 지분은 오랫동안 (주)영풍을 소유한 장씨 가문에게 뒤처져 있었으나 지금껏 고려아연을 실질적으로 성장시킨 주역은 정작 최씨 가문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하루아침에 기업 경영에서 쫓겨나고 기업 소유권마저 잃게 되는 끔찍한 상황은 차마 받아들이기 어려울 듯하다. 그래서 이번에 MBK파트너스라는 막대한 투기자본까지 가세한 ‘고려아연 쟁탈전’은 여느 지분 싸움 못지않게 치열하게 진행될 공산이 커 보이며, 그 결과를 쉽사리 예측하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증시 안팎으로 커다란 파열음을 일으킬 듯하다.
이미 고려아연과 전략적인 제휴를 맺은 다양한 거대 기업들의 면면들만 봐도 이번 고려아연 공개매수는 그저 최씨 가문과 장씨 가문 사이의 동업자 관계 청산이라는 단순한 성격을 훌쩍 뛰어넘는다. 1974년 설립 이래 50년 동안 고려아연 경영을 도맡아온 최씨 가문 사람들은 LG화학, 한화에너지, 현대차, 한국타이어, 한국투자증권, 트라피구라, 조선내화 등 실로 다양한 기업들과 사업상의 제휴뿐만 아니라 자본 유치까지도 착착 진행해 왔다. 이들 기업이 투자한 고려아연의 지분만 하더라도 무려 18.37%(380만2278주, 9월 13일 종가 기준 2조5323억원)에 이른다. 이들이 당장 적대적 M&A에 노출된 최윤범 회장 측을 얼마만큼 도와줄지도 크나큰 변수로 작용할 듯하다. 최씨 가문과 장씨 가문의 동업 관계가 끝끝내 파국에 다다르자 엉뚱하게도 국내 굴지의 재벌기업들과 약탈 자본을 상징하는 거대 사모펀드와의 싸움으로 크게 번지는 형국인 셈이다.
공개매수를 통한 지분 확보전에 뛰어든 MBK파트너스에서도 이미 현대자동차, LG화학, 한화에너지 등 최윤범 회장 측의 우호 세력으로 인정받아 온 기업들과 접촉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고려아연을 이끄는 최윤범 회장 측은 고려아연과의 사업 관계 등으로 이들 기업과 오래전부터 교류해 온 만큼 여전히 강력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이들 기업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만 살펴보더라도 MBK파트너스와 손을 맞잡은 영풍 측이 얼마만큼 커다란 싸움을 걸고 나섰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추석 연휴 동안에 들려온 또 다른 소식도 흥미롭다. 울산시장과 울산시의회에서 지역 경제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고려아연 지키기 운동’에 뛰어들었다는 뉴스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번 고려아연 쟁탈전이 그저 두 가문 사이의 오랜 동업 관계의 청산으로만 바라보기 힘든 이유는 많다. 이번 공개매수가 그만큼 다층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파장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