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쇼몽, 진보정권의 ‘부동산 딜레마’ [김경훈의 시네노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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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몽, 진보정권의 ‘부동산 딜레마’ [김경훈의 시네노믹스]
  • 김경훈 영화칼럼니스트
  • 승인 2026.09.04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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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의 장막’에서 빠져나오기
영화 ‘라쇼몽’의 한 장면. /사진=RKO라디오픽처스
영화 ‘라쇼몽’의 한 장면. /사진=RKO라디오픽처스

사물이나 현상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데 ‘격물치지’(格物致知) 하며 집중해 본 사람들은 그 불가해함에 질려버리는 상황에 부닥친다. 그때 선택하는 방법론으로는 불교의 관념적인 유식학(唯識學)을 기반으로 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나, 유교 이기론(理氣論)의 근원인 ‘음양오행설’(陰陽五行設)이나,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이나, 현대물리학의 ‘양자역학’(量子力學) 등이 있다.

무엇에 의지하던 우리가 그토록 고대하던 실체적 진실이나 물자체에 대한 완전한 인식 혹은 규명은 결국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러한 인간의 숙명을 도식적으로 드러낸 영화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羅生問)>이다.

사실 위에 음양오행, 변증법, 양자역학 등은 모두 운동(movement)을 내포하고 있다. 변증법적 범주들이 모순관계를 이루며 충돌하고 운동하는 상황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양자(兩者) 간의 역학관계가 오행의 현상으로 포착되며 이것이 언뜻 보면, 욕망이나 두려움, 질투심 등에 사로잡힌 인간에게는 특히 관계나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는 데 있어 난관에 봉착하게 하고 원자 단위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물질이, 그 입자가 파동이라는 관측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의 의식이나 관념 또한 펄스(pulse) 같은 전자적 현상이라고 볼 때, 우리의 정신활동이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 속 소립자들의 파동과 사실상 동일하다고 하는 직관에 이르는 길이 열린 셈이다. 또한 물가와 고용 등에 관한 경제현상을 다루는 경제학 역시 당연히 변증법적 훼예포폄(毁譽褒貶) 아래 놓여있다고 본다면, 우리의 전망 또한 예측 모델 밖에서 맴돌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최근 자본시장이 상식 밖의 변동성에 노출되어 흔들렸기 때문에 우리는 늘 그렇듯이 유동성과 이자율, 환율 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점검해 봐야 하는데, 이때 역시 경제주체들의 입장을 바닥에 깔고 있어야 한다.

주택과 주식을 자산 포트폴리오 구성에 담아두고 고민하는 일반적인 근로 소비 대중의 입장에서, 7월 이후 급락한 환율과 한국은행의 백투백 금리 인상은 적어도 자본시장의 안정화에 상당 부분 기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2022년 이후 계속되었던 미국과의 금리 역전 현상은 해소되고 환율은 제자리를 잡아갈 가능성이 커졌다. 불필요한 ‘재정거래’(arbitrage transaction: 시장 간에 가격이 상이할 때 가격이 싼 시장에서 매입하여 비싼 시장에 매도함으로써 추가적 위험부담 없이 매매차익을 얻는 거래)가 줄어들고 자본시장은 효율성을 키워갈 것이다.

더불어 부동산 가격의 안정화에도 일정 부분 기여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김대중정부만이 회피한 진보정권의 부동산 정책 딜레마는 경제 회복과 부동산 가격의 억제라는 자기모순이 초래한, 결코 빠져나오기 쉽지 않은 진흙 구덩이 같은 것이다.

억눌린 수요는 대부분 유권자의 의지로서 가감 없이 표출되었다. 덕분에 누더기가 된 부동산 관련 세제는 이미 법의 권위를 상실한 지 오래되었고 마치 욕망의 사전같이 어근(語根)은 박제되고 수많은 어미(語尾)는 예외의 예외로만 꿈틀거릴 뿐이다.

김대중정부만이 회피한 진보정권의 부동산 정책 딜레마는 경제 회복과 부동산 가격의 억제라는 자기모순이 초래한, 결코 빠져나오기 쉽지 않은 진흙 구덩이 같은 것이다. /이미지 사진=클립아트코리아
김대중정부만이 회피한 진보정권의 부동산 정책 딜레마는 경제 회복과 부동산 가격의 억제라는 자기모순이 초래한, 결코 빠져나오기 쉽지 않은 진흙 구덩이 같은 것이다. /이미지 사진=클립아트코리아

따라서 여전히 현 정부의 부동산에서 주식으로 무게중심의 이동이라는 정책적 비전은 유효하고 그 단초는 금리의 정상화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은행의 행보는 연날리기를 떠올리게 한다. 얼레에 감긴 연줄을 풀기만 하면 연은 추락하게 된다. 감을 때 감을 줄 알아야 연은 팽팽하게 높게 난다.

다음은 반도체 등 몇몇 산업의 특수가 가져온 유동성의 범람이다. 오직 이 산업들에서만 투자하고 소비할 여력이 있기 때문에 엄격히 말하면, 유동성의 신기루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배당을 하든 상여금으로 지급하든, 그래야만 그나마 투자와 소비가 신속하게 시의적절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차라리 잉여금을 AI 산업에 대한 재투자 시 법인세 감면 여부를 논의하는 것이 떠나간 외국인 투자가들에게는 주주환원보다 매력적인 신호로 읽힐 것이다. 이처럼 경제정책의 효과에 대한 전망과 사후적 해석은 라쇼몽처럼 분분하다.

<라쇼몽>은 형식적으로 무사 살해극에 관련된 당사자 3명과 목격자의 증언을 평면적으로 나열하지만, 그 단순성이 각자의 증언을 모순되지 않게 하고, 오히려 격렬하고 충동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 맹렬함 속에 각자의 욕망이나 질투심은 초라해지고 서로를 경멸하면서도 각자가 모욕감 앞에서 거세되거나 버려지는 느낌이 지배적인데, 아마 맥아더의 미군정 지배하에 놓인 일본 전체가 겪었을 트라우마에 대한 성찰 없는 변명으로 읽힌다. 알 수 없는 인생처럼 시간의 흐름은 역사의 맥락을 왜곡하기 쉽게 만든다.

망상에 빠진다는 것은 살펴보면 결국 타자를 대하는 방식에 문제가 생겼을 때 발생한다. 큰 타자 A가 사회의 가치체계와 불일치함에도 거대할 때, 대상적 타자 a가 지닌 결핍이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매혹적일 때 사로잡히게 된다.

<라쇼몽>의 인물들은 2차대전 직후 도쿄에 진주한 미군정, 패배한 군국주의 세력, 식민지국가의 부역자들 그리고 일반 시민들을 상징한다. 당연히 미군정을 제외하고는 히로히토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패전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전황이 바뀔 것이라는 몽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익숙한 방식대로 희생양이 필요함에도 패전의 책임을 누구에게도 뒤집어씌우지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가 수년간 지속되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어쩌면, 버블경제 붕괴 이후 30년 이상 지난 현재까지도 국민국가의 시민이 아닌 일왕의 신민으로서 살아가는 분열된 주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오래전 시골에 있는 어느 고시원에서 머무르고 있을 때 친일파의 후손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의 여동생은 정신병원에 입원한 지 오래였고 그의 유일한 호구책은 국가를 상대로 한 토지 반환 소송에서 이기는 것뿐이었다. 그는 예민하고 지성은 꽉 차 있었지만,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굴레는 그 같이 양심이 온 마음을 지배하는 사람에게는 벗어던질 수 없는 것이었다.

지난 80년이 어떤 친일파 후손에게는 “우리 편에 서서 고맙게 흘러간 세월”이었다면, 다른 친일파 후손에게는 야심에 재갈이 물린 채 재처럼 타버리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간단하게 입장과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안일한 것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비교적 무차별하게 굴러가지만, 해석의 여지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지만, 카르마의 칼날은 비껴가지 않는다. 때가 되면 정확하게 그 대가를 치른다. 결국 인식의 한계는 연기(緣起)의 내재성에서 결정적으로 돌파된다.

따라서 지혜로운 자는 언제나 타자의 얼굴을 직면한다. 누군가 들떠서 초끈 이론(superstring theory)을 설명하거나 가까스로 일어나 고개를 저으며 기타를 칠 때는, 그와 눈을 마주쳐야 한다.

사실 그는 최선을 다해 자신과 세계와의 불화를 해소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배우고 익히는 자의 자세이고 세계를 바꾸려는 자의 정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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