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 분야에서 필자의 세부 전공은 통계물리학이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호작용하는 많은 입자로 이루어진 커다란 시스템을 연구한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통계물리학자가 연구 분야를 물리학 밖으로 본격 확장하기 시작했다. 복잡계 과학이라 불리는 분야가 크게 발전했다. 전통적인 통계물리학이 원자나 분자 같은 물리학의 입자로 이루어진 시스템을 대상으로 한다면 새롭게 부상한 복잡계 과학은 많은 구성 요소로 이루어진 다양한 시스템을 대상으로 한다. 시스템을 구성하는 요소가 굳이 입자일 필요가 없다. 많은 사람이 모여 만들어내는 사회 현상, 많은 세포가 모여 창발하는 생명 현상, 많은 행위자가 거래에 참여하는 경제 현상 등, 여러 다양한 주제가 복잡계 과학의 대상이 된다. <부의 기원>은 복잡계 경제학을 소개하는 책이다.
책의 저자 에릭 바인하커는 권위 있는 유명 컨설팅 회사 매킨지에서 18년의 현장 경력을 가진 복잡계 경제학자다. <부의 기원>은 전통적인 경제학에 대한 저자의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 한계를 짚어보고, 나아가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복잡계 경제학과 진화 경제학의 관점을 설명한 책이다. ‘1장. 부는 어디서 오는가?’는 저자의 문제의식과 짧은 답이 함께 담겨있는 책 전체의 짧은 요약에 해당한다. 아마존 숲에서 전통적인 생활 방식으로 살아가는 원주민과 뉴욕에 사는 뉴요커를 비교하면 당연히 우리는 뉴요커가 더 부유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근거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답하기가 쉽지 않다. 비슷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다른 두 집단의 부유함의 정도를 양적으로 비교할 수 있을까? 저자는 부의 양을 재는 정량적 지표로 ‘구매 가능 상품의 다양성’(Stock keeping units, SKU)을 이용하자고 제안한다. 부가 과연 ‘무엇’인지는 정말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직접적인 답 대신 부의 양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지 생각하자는 얘기다. 물리학에서 과연 시간이 무엇인지 답하기는 어려워도 시간을 어떻게 측정하는지는 조작적 정의(operational definition)의 방법으로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답하기 어려운 ‘무엇(what) 질문’을 ‘어떻게(how) 질문’으로 치환하면 여러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해진다. 부의 지표로 SKU를 이용하자는 저자의 제안은 상당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 뉴요커의 SKU는 무려 100억 정도이며 인류의 SKU는 산업혁명기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도대체 어떻게 인류 역사의 0.6%에 불과한 짧은 기간 안에 경제의 복잡성과 다양성이 이처럼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을까? 저자는 산업혁명기에 일어난 상품 다양성 대폭발을 지구 생명의 긴 역사에서 일어났던 몇 번의 종 다양성 대폭발과 연결한다. 진화는 생명계뿐 아니라 경제계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일종의 범용 알고리즘이며, 물리적 기술과 사회적 기술의 공진화로 현대의 복잡한 경제 시스템이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책의 2장은 전통 경제학의 눈부신 성공의 역사를 다룬다. 대학교 경제학 교과서에 들어있어 지금도 모든 경제학도가 공부하는 표준적인 내용으로 정의할 수 있는 전통 경제학은 1776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미스는 부의 창출의 비밀은 바로 노동 생산성이며, 노동 생산성의 비밀은 분업과 전문화라고 주장했다. 모든 공정을 혼자서 완수해야 한다면 노동자 한 명이 하루에 딱 20개의 핀을 생산할 수 있지만 분업과 전문화가 이뤄지면 하루에 1인당 자그마치 4800개의 핀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는 생생한 예를 통해서 분업이 생산성을 크게 증대시킨다는 것을 보였다. 핀 공장 노동자는 핀이 아니라 빵을 먹는다. 결국, 여러 영역에서 분업과 전문화가 진행되면 시장에서의 거래가 활발해진다. 스미스는 “우리가 기대하는 저녁은 정육업자, 양조업자, 제빵업자의 자비심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에서 나온다”라고 했다. 저마다 각자는 이기적인 동기로 이익을 추구하는데 그 결과로 사회 전체가 윤택해질 수 있다. 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가능케 하는 경쟁적 시장의 메커니즘이 바로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
저자는 이어서 전통 경제학의 발전에 기여한 여러 위대한 경제학자를 하나씩 소개한다. 다음에 시간을 내서 꼭 공부해 보고 싶은 내용이 여럿 등장한다. 수확 체감의 법칙을 발견한 자크 튀르고, 효용의 개념을 처음 제안한 제레미 벤담, 그리고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을 발견한 헤르만 하인리히 고센이 등장한다. 드디어 1874년 레옹 발라는 물리학의 평형 개념과 수학의 미분을 경제학에 적용해 일반 균형이론을 제시하게 된다. 이어서 빌프레도 파레토는 거래 당사자 둘 모두가 이익을 보거나 적어도 한쪽이 손해가 아닌 상태를 일컫는 파레토 우위 거래가 모든 소진된 균형점인 파레토 최적을 제안했다. ‘파레토 최적’은 자유 시장에서 누군가의 희생 없이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균형 상태다. 20세기 중반 경제학은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의 신고전파 종합을 이루게 된다. 당시 크게 기여한 케네스 애로는 발라의 일반 균형과 파레토 최적을 연결해서 몇 공리에서 출발해 모든 시장의 공급과 수요가 일치하는 일반 균형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게 된다. 이는 시장 자본주의가 우월하다는 수학적 증명으로 여겨져 냉전 시대에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저자는 눈부신 전통 경제학의 일반 균형이론을 고딕 대성당에 비유한다. 하지만 아름답고 웅장한 신고전파 전통 경제학의 건축물은 너무나도 불안한 기반 위에 놓여있다고 진단한다. 저자는 전통 경제학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오해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자신은 과거 전통 경제학의 눈부신 업적을 훼손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전통 경제학에 대한 비판을 반영해 경제학을 지금보다 더 발전시킬 수 있으며, 바로 이것이 발라의 대성당을 만든 위대한 이들의 유산을 더욱 빛내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전통 경제학의 토대가 불안정하다는 저자의 진단이 3장의 주된 내용이다. 1901년 일반 균형이론을 만들어낸 발라는 자신의 책 <순수 경제학 요론>을 당대의 유명 과학자 푸앵카레에게 보낸다. 발라의 책을 살펴본 푸앵카레는 “당신은 인간을 무한히 이기적이고 무한히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존재로 간주하고 있다. 첫 가정은 인정할 수도 있지만 두 번째 가정은 보류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깁스와 볼테라 등 다른 과학자도 “경제학에 수학적 근거를 부여하는 시도는 바람직하지만, 방정식을 풀릴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현실을 던져 버려서는 안 된다”라는 비판을 들려준다. 경제학자 레이온후프트도 “현실 경제는 복잡한 상황에 놓인 단순한 사람들로 이뤄지는데, 전통 경제학은 단순한 상황에 놓인 엄청 똑똑한 사람을 가정한다”라며 마찬가지의 아쉬움을 얘기했다. 이런 여러 비판은 하나같이 전통 경제학의 ‘완전 합리성’ 가정의 비현실성을 지적한 것이다. 독자도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우리는 <스타트렉>의 엄청 똑똑한 외계인 스폭이 아니다. 전국 모든 주유소의 실시간 가격과 주유소까지 가는 시간에 관련된 기회비용을 고려해 기름 넣으러 갈 주유소를 고르지 않는다. 앞으로 며칠 펼쳐질 미국-이란 전쟁의 상황 변화에 대한 확률적 예측을 반영해 최적 주유 날짜를 계산하지도 않는다. 그냥 적당한 가격에 적당한 거리의 주유소에 적당한 시간에 방문해 기름을 넣는다. 계산 불가능한 최대 만족을 추구하지 않고 적당한 만족을 추구한다.
3장에 소개된 저자의 전통 경제학 비판 중에 경제학의 ‘외부성’(externality) 개념이 물리학자인 내게 특히 흥미로웠다.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려는 물리학자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바로 시스템과 주변 환경 사이의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눈을 들어 자연을 보라. 자연 어디에도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는 없다. 경계는 물리학자인 내가 문제를 풀기 위해 임의로 설정하는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책상 위 두 물체를 줄로 연결해 잡아당기는 간단한 물리학 문제를 생각해 보자. 두 물체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설정하면 두 물체를 연결하는 줄의 장력을 구하지 않고도 쉽게 두 물체가 움직이는 가속도를 구할 수 있다. 한편, 두 물체를 각각 두 시스템으로 설정해 문제를 풀 수도 있다. 이 경우 전체의 가속도를 구하기는 좀 번거로워져도 둘을 연결하는 줄의 장력 계산이 가능해진다. 물리학에서 시스템을 어떻게 설정할지는, ‘문제 푸는 내 맘’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을 이해하고 싶은지에 따라 그때그때 얼마든지 다르게 경계를 설정할 수 있다. 3장에서 저자가 비판하는 전통 경제학은 다르다. 전통 경제학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기 곤란한 것을 외부효과로 명명하는 순간, 시스템의 이해에 중요할 수도 있었던 내부의 것이 시스템과 무관하게 외부에서 어쩌다 발생한 무언가로 간주 되는 착시가 발생한다. 특히 통계물리학의 입장에서는 네트워크 외부성이라는 전통 경제학의 개념이 곤혹스럽다. 구성 요소 사이의 상호작용을 무시하면 현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통계물리학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전통 경제학의 외부성은 세상의 객관적인 속성일 수 없다. 경제 현상을 이해하려는 경제학자가 머릿속에서 임의로 설정한 경계가 외부성의 근원일 뿐이다. 모든 것이 내부여서 외부효과는 어디에도 없다고 내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외부성의 임의성을 잊지 말자는 얘기다.
복잡계 경제학을 다룬 2부와 경제 현상을 진화의 관점에서 다룬 3부가 책의 중심적인 부분이다. 저자는 복잡계 경제학은 여전히 미완성이며 현재 여러 방향으로 발전 중이어서 아직은 통합된 이론이 아니라고 말한다. 복잡계 경제학은 정립된 학문 분과라기보다는 여러 연구자가 추진하고 있는 느슨하게 관련된 일종의 연구 프로그램에 가깝다. 이 책이 통합된 방식으로 일목요연하게 복잡계 경제학을 소개하는 방식일 수 없는 이유다. 책의 2부는 복잡계 경제학이라는 연구 프로그램의 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중요 연구를 차례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2부에서 다뤄진 내용 중 내게 가장 흥미로운 것이 4장에서 자세하게 소개된 엡스타인과 액스텔의 ‘슈거스케이프(sugarscape) 모델’이다. 이 부분을 찬찬히 읽어 보기를 권한다. 복잡계 경제학 연구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그 생생한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슈거스케이프 모델은 설탕(sugar) 산의 지형(landscape)이 펼쳐진 바둑판 모양 가상의 사각 격자 위에서 펼쳐진다. 슈거스케이프 모델의 행위자는 유전적으로 정해진 가시 범위 내에서 설탕을 찾아 격자 위를 이동해 설탕을 섭취한다. 유전적으로 정해진 대사량에 따라 소비되고 남은 설탕은 일종의 체지방같이 행위자의 몸에 축적된다. 행위자는 설정된 최대 수명까지 살 수 있지만 만약 축적한 설탕 보유량이 ‘0’이 되면 기아로 사망한다. 어쩌다 설탕산에서 먼 곳에서 태어난 행위자는 굶어 죽기도 하고, 설탕산 인근에 성공적으로 이동한 행위자는 더 많은 설탕을 축적하기도 하는 등, 슈거스케이프 모델의 테두리 안에서 흥미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출현하는 설탕 보유량의 확률분포가 정말 흥미롭다. 처음 설탕 보유량은 도긴개긴 비슷한 상태에서 출발했음에도, 최종적으로는 전체 설탕의 80%를 20%의 행위자가 보유해 80/20 법칙을 따르는 꼬리가 긴 설탕 분포가 만들어진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유전적 특성은 그리 다르지 않아 정규분포를 따르지만, 현실 세상의 부는 80/20 법칙을 따르는 불평등한 멱함수 꼴 확률분포가 만들어진다. 슈거스케이프 모형에 유성생식을 추가해 부의 대물림이 가능케 하면, 부의 격차가 훨씬 더 벌어지며 인구 증가와 인구 감소의 사이클이 형성된다. 또한, 설탕에 더해서 향료라는 자원을 추가하고 각 행위자의 선호를 다르게 하면 자연스럽게 거래가 일어나며 전체 부의 양이 늘어나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 현실을 극도로 단순화한 슈거스케이프 모델이 현실에서 관찰되는 경제 현상을 명확하게 재현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타고난 조건이 같아도 우연의 요소가 개입되어 발생하는 수평적 불평등은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우리에게 익숙한 현상이다. 슈거스케이프 모델은 수평적 불평등을 재현해 내지만, ‘대표 행위자’(representative agent)를 가정하는 전통 경제학에서는 수평적 불평등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도 저자가 전통 경제학을 비판하는 이유다. 다른 이유도 있다. 설탕과 향료의 자발적인 거래로 슈거스케이프 모델에서 수요-공급 곡선이 형성된다는 것은 전통 경제학에 부합한다. 하지만 두 곡선이 교차하는 균형점이 아닌 다른 곳에서 거래가 일어난다는 것은 균형과 최대 효율을 강조하는 전통 경제학의 예측과 확연히 다르다. 슈거스케이프 모델은 거래로 인한 부의 증가, 공급과 수요의 법칙 등 전통 경제학의 기본적인 요소를 재현하지만, 수평적 불평등의 발생, 균형점이 아닌 조건에서 일어나는 거래, 일물일가 법칙의 위배, 거래량과 가격의 큰 변동성 등은 전통 경제학의 예상과 다르다. 분명한 것은 슈거스케이프 모델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경제 현상을 전통 경제학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재현한다는 사실이다.
책의 3부는 경제 시스템을 이해하는 진화의 관점을 소개한다. 이 부분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이 바로 대니엘 데닛의 책에서 저자가 차용한 ‘도서관’의 비유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바벨의 도서관’은 가능한 모든 500페이지 책이 소장된 도서관이다. 바벨의 도서관에는 500페이지 모두 a만 가득 적힌 책도 있고, 허먼 멜빌의 <모비딕>도 당연히 있다. 그런데 <모비딕>과 정확히 같은 내용이지만 고래 이름이 모비딕이 아닌 보비딕인 <보비딕>도 도서관에 있다. 아직 쓰이지 않은 2042년 베스트셀러도 그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바벨의 도서관은 엄청 클 것이 분명하지만 소장 도서의 숫자는 어쨌든 유한하다. 바벨의 도서관을 생명계로 확장한 것이 대니엘 데닛의 ‘멘델의 도서관’이다. 가능한 모든 DNA 생명체의 디자인이 수록된 공간이다. 저자는 500개의 레고 블록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레고 디자인이 들어있는 ‘레고 도서관’도 생각한다. 이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엄청난 숫자의 레고 디자인 중 멋지고 흥미로운 디자인은 극소수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가능한 모든 사업 계획서가 소장된 방대한 ‘스미스의 도서관’도 생각해 보자고 제안한다.
저자가 이런 여러 다른 도서관을 상상하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이 중 하나의 도서관을 방문해서 그 안에 소장된 엄청난 숫자의 디자인 중 최적의 디자인을 골라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멘델의 도서관을 방문해서 서고를 하나씩 찾아가 책 한 권을 하나씩 열어보는 방식으로 과연 우리가 현실 초파리의 DNA 서열을 찾을 수 있을까? 너무나도 방대한 스미스의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 든 책이 삼성전자의 사업 계획서일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저자는 멘델의 도서관, 스미스의 도서관, 그리고 레고 디자인 도서관 같은 여러 광활한 도서관 속 좋은 디자인을 빨리 찾아내는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어떤 도서관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이런 탐색 알고리즘 중 1등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화’라고 답한다. 진화는 너무나도 방대한 디자인 공간에서 최적 디자인을 찾아내는 최고의 기질 독립적 알고리즘이다.
많은 부품이 연결되어 움직이는 자동차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설계자가 디자인한 것은 목적에 대한 적합성(합목적성)과 복잡성을 보여주는 것이 많다. 사람들은 복잡성과 합목적성을 보여주는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디자이너의 존재를 떠올린다. 비과학적인 지적설계론을 많은 이가 그럴듯하다고 수용하게 되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생각의 흐름이다. 하지만 자연스럽다고 해서 진실은 아니다. 사람의 눈처럼 합목적성과 복잡성을 명확히 드러내는 것을 보면서 디자이너의 존재를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우리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운 긴 시간 연이어 진화라는 알고리즘이 작동하면 얼마든지 눈이 출현할 수 있다. 대니엘 데닛이 디자이너 없이 디자인을 창조하는 방법이 바로 진화라고 말하는 이유다. 진화는 목적하는 주체 없이도 합목적성이 출현하는 놀라운 메커니즘이다.
진화라는 알고리즘이 작동하는 광활한 디자인 공간에서 디자인 하나는 적합도라고 불리는 숫자를 갖는다. 멘델의 도서관에서 적합도는 바로 주어진 유전자 디자인으로 출현하는 자손의 수에 비례한다. 그렇다면 진화는 적합도 지형에서 높은 봉우리를 찾아가는 알고리즘이다. 저자는 적합도 지형 위를 움직이는 대표적인 두 전략으로 활용(exploitation)과 탐색(exploration)을 말한다. 현재 위치에서 가까운 곳을 골라 작은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것이 활용 전략이라면 무작위적으로 훌쩍 멀리 점프하는 것이 탐색 전략이다. 둘 중 어떤 전략을 주로 이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지는 주어진 적합도 지형의 모습에 따라 달라진다. 넓은 평지 위에 딱 하나의 높은 산이 있는 꼴의 적합도 지형에서는 그냥 꾸준히 작은 발걸음을 이어가는 활용 위주의 전략으로도 얼마든지 높은 봉우리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많은 골짜기와 많은 봉우리가 마구잡이로 섞여 있는 지형이라면 방금 내디딘 작은 발걸음으로 깊은 골짜기로 떨어질 수도 있다. 실제 생명의 적합도 지형은 현실의 산세를 닮았다. 삐죽삐죽 많은 봉우리가 있지만 봉우리 근처라면 작은 발걸음을 이어가서 꼭대기에 오를 수도 있는 지형이다. 지구 모든 생명은 활용과 탐색 전략의 황금비를 끊임없이 모색하며 복잡한 적합도 지형을 여행한다. 높은 봉우리에 도착해 성공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잠시뿐, 그곳의 높이가 낮아져 다시 또 길을 나선다.
저자는 생명뿐 아니라 경제도 적합도 지형 위에서 더 나은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파악한다. 진화의 과정으로 도달한 적합도 지형의 봉우리 정보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생명계처럼 경제도 마찬가지로 성공한 사업 모형이 더 널리 확산된다고 말한다. 경제 시스템과 생명 시스템을 디자인 공간, 적합도 지형, 그리고 기질 독립적 탐색 알고리즘으로서의 진화로 연결해 이해하려는 시도가 바로 진화 경제학의 관점이다. 진화의 눈으로 본 경제 현상은 전통 경제학과 다르다. 끊임없이 변해가는 적합도 지형에서 높은 봉우리에 도달했다고 그곳이 늘 봉우리로 계속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경제는 균형점에 도착할 수 없는 영원히 지속되는 끊임없는 경주에 가깝다. 진화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종 다양성 대폭발과 단속 평형이 경제 현상에서도 관찰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다. 책의 앞부분에서 저자가 보여준 산업혁명 이후의 SKU의 폭발적 증가는 생명 진화의 역사에서 일어난 캄브리아기 대폭발에 해당하는 셈이다.
저자는 복잡계 경제학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연구 프로그램에 가깝다고 말한다. 이 책이 쓰이고 2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다. 복잡계 경제학의 비판을 일부 수용하지만 실제 연구 현장에서는 여전히 기존의 방법을 고수한다고 저자는 전통 경제학을 비판하지만, 복잡계 경제학도 마찬가지로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이 솔직한 내 생각이다. 복잡계 경제학이 전통 경제학을 비판하는 문제의식에는 귀 기울일 가치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래서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안을 복잡계 경제학이 충분히 제공하지는 못하고 있다. 현재 복잡계 경제학에 대한 사회과학 분야의 관심은 20년 전에 비해 줄어들었지 더 늘었다고 보기 힘들다. 복잡계 경제학을 포함한 복잡계 과학의 고민은 바로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에서 더 나아가 미래의 예측과 구체적인 해결 방안의 도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어렵다면 복잡계 경제학의 미래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눌 주제
1. 전통 경제학이 잘 설명하는 경제 현상과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의 예를 들려주세요.
2. 여러 부품으로 구성된 시계처럼,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것은 복잡하며 특정 목적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계는 디자이너가 있지만 생명은 디자이너가 없다고 진화론은 설명합니다. 디자이너 없이도 디자인이 저절로 출현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요?
3. “복제를 잘하는 것이 복제되며, 확산을 잘하는 자가 확산된다”라는 말로 저자는 진화의 원리를 단순하게 요약합니다. 그 의미를 설명해 보세요.
4. 저자는 부는 지식이며 부의 기원은 진화라고 주장합니다. 그 의미를 들려주세요.
5. 사회주의는 경제 계획 당국의 합리성을 가정하지만, 필요한 계산량이 막대해서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목표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앞으로 다가올 인공지능의 획기적 발달로 사회주의적 계획 경제가 가능해질 수도 있을까요?
6. 저자는 퍼트넘의 <나홀로 볼링>을 소개하며 개인 간의 신뢰가 하락하면서 사회적 자본의 감소로 위기가 도래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현재 우리가 엄청난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유튜브나 AI로 사회적 자본은 더 줄어들고 있을까요?
7.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다음 세대에는 인공지능과 나노 기술이라는 새로운 물리적 기술이 부상할 것이며 우리의 사회적 기술이 물리적 기술 발전을 따라잡지 못하면 세계적 재앙의 위험성은 계속 커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20년 전 저자의 진단을 현재의 상황에 비춰 생각해보세요.
8. 복잡계 경제학의 문제의식은 타당해 보이는데 현실에서 구체적인 도움을 주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