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 뭉크, ‘비욘드 더 스크림’(Beyond the Scream) [강태운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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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 뭉크, ‘비욘드 더 스크림’(Beyond the Scream) [강태운의 빛과 그림자]
  • 강태운 미술칼럼니스트
  • 승인 2024.05.27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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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화가이자 판화가인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는 표현주의 선구자이다. 삶과 죽음, 사랑, 불안과 고독 등 인간의 심오한 감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뭉크는 왜곡된 형태와 강렬한 색감으로 표현주의 예술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든다. 꼭 왜곡된 형태로 표현해야 했을까. 뭉크는 초상화에 일가견이 있었고, 순수와 성적 매력을 가진 여성 그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실력을 갖춘 화가였다.

다섯 살 뭉크는 엄마를 결핵으로 잃었다. 엄마와 다녀온 마지막 소풍을 뭉크는 잊을 수가 없었다. 소중한 추억을 남겨주려고 엄마가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준비한 소풍이었다. 엄마 생각이 날 때면 뭉크는 뭉클했다. 연이은 가족의 죽음으로 그 뭉클함은 불안으로 이어졌다. 한 살 많은 누이는 열다섯 나이에 결핵을 앓다 죽었다. 사람이 병이 들면 아프고, 아프면 큰 베개가 있는 병상에 눕고, 더 이상 아플 힘도 없으면 죽는다는 것을 뭉크는 생생하게 지켜봤다. 뭉크의 잠재의식은 숨을 쉬는 동안 항상 죽음을 경험하고 있었다. 뭉크는 답답했다. 아니 절망스러웠다. 지금 자신이 겪는 이 고통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어디서 왔고 어디를 향하는지 뭉크는 결코 알 수 없었다.

가까운 사람을 잃으면 그 부재의 자리에는 불안과 고독이 찾아온다. 뭉크에게 미래는 안개 속이었지만 과거에 겪은 불행은 눈앞에 선명했다. 그것은 뭉크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뭉크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뭉크는 더 이상 남자는 책을 읽고 여자는 뜨개질하는 모습을 그리지 않기로 했다. “숨 쉬고, 느끼고, 고통받고, 사랑하는, 살아있는 인간을 그릴 것이다.”

뭉크는 고통을 알고 싶었다. 알기 위해서는 표현해야 했다. 그간 내면의 고통을 표현한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얼굴이 대표적이었다. 굶주리고 아픈 자, 앞 못 보는 자, 문둥병자, 앉은뱅이, 돌을 치켜든 남성들에 둘러싸인 죄 많은 여인, 무엇보다 자신을 속이고 있는 우리가 겪는 고통의 합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얼굴이었다. 시간과 공간에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고통이 집약된 예수 얼굴은 너무 사실적이었다. 사실적으로 표현된 고통은 예수에게 허락된 정형화된 고통이었다. 개별 인간의 고통을 대변할 수 없었다.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은 북유럽을 대표하는 회화 방식이다. 뭉크는 사실주의 기법으로 개별 인간의 고통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다. 타의(他意)가 없는 자연은 고통을 모른다. 고통을 모르는 자연으로부터 그 무엇도 보고 그릴 수 없었다. 뭉크는 알 수 없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인상주의, 입체주의 및 상징주의를 두루 거쳤다. 뭉크에게 중요한 것은 표현이었다.

뭉크의 표현주의 기법은 뭉크 개인의 경험에서 나온 독창적인 스타일이다. 왜곡은 의도된 무엇이 아니다. 알 수 없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뭉크가 취한 겸손의 방편이었다. 고통은 실존적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 분명 자신이지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낯선 모습이다. 그 만남은 개인의 내면과 주위의 관계를 파괴하면서 시작한다. 고통은 동행을 모른다. 그동안 고통 앞에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고통을 주위와 나눌 수 없다는 실존적 외로움뿐이었는데, 인간은 뭉크를 만나서 내면의 고통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표현하면 주위와 나눌 수 있다.

“나는 예술을 통해 삶의 의미를 나 자신에게 납득시키려고 한다. 나의 그림은 자발적인 고백이며, 이기적인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세상은 여전히 고통받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뭉크의 손끝을 따라 저마다의 고통을 표현할 줄 안다. 표현하고 나눌 수 있기에 이제는 외롭지 않다. 우리가 뭉크의 <절규> 앞에서 절망이 아니라 위로를 떠올리는 이유다.

지난 22일부터 9월 19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에드바르 뭉크: 비욘드 더 스크림(Beyond the Scream)>이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뭉크의 생애와 예술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아시아 최대 규모 전시다. 뭉크는 다작 화가다. 뭉크가 다뤘던 주제는 광범위해서 이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문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학에서 빠지지 않는 주제가 ‘사랑과 이별’, 그리고 ‘삶과 죽음’이다. 뭉크는 인간 존재의 갖가지 면모를 담은 하나의 작품을 제작하려고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생의 프리즈”다. “생의 프리즈”에 해당하는 작품들은 개별적으로 접근하기보다 연작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전후 문맥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하나의 서사가 된다. “생의 프리즈”는 ‘사랑의 깨달음’ ‘사랑의 개화와 이별’ ‘삶의 불안’, 그리고 ‘죽음’이라는 네 가지 주제로 나눠진다.

‘키스, The Kiss’, 1892, 캔버스에 유화
‘키스, The Kiss’, 1892, 캔버스에 유화

불타오르는 사랑의 절정을 상징하는 <키스>는 에드바르 뭉크의 <생의 프리즈> 시리즈에서 가장 상징적인 모티프이다. 이 작품은 남녀의 시각적 융합을 완전한 방황의 순간으로 묘사한다. 그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함께함은 일시적이며, 개인성을 잃는 대가로서만 얻어지는 것이다.

이별, 질투, 우울, 깊은 절망,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죽음이라는 주제가 항상 그 뒤를 따른다. 뭉크는 1880년대부터 그의 사망 직전까지 ‘키스’라는 주제에 전념했으며, 수많은 스케치, 드로잉, 열 점의 판화, 그리고 열두 점 이상의 회화 작품에서 이를 다양하게 다루었다.

‘뱀파이어 Vampire’, c.1895, 종이에 파스텔
‘뱀파이어 Vampire’, c.1895, 종이에 파스텔

뭉크의 <뱀파이어> 모티프에 대한 개념은 매우 모호하다. 자전적 기록에서 그는 “이것은 경고다... 여기 이 그림은 사랑이 죽음과 함께한다는 것을 말한다”라고 표현한다. 뭉크의 친구 스타니슬라브 프지비셰프스키가 ‘뱀파이어’라는 제목을 붙였으며, 1894년 스톡홀름에서 처음으로 이 제목을 사용했다. 흡혈귀의 입맞춤은 치명적이지만 사랑이나 위로의 행위이기도 하다. 연인 뒤에 숨어있는 그림자는 위협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매개체일 수도 있다. 40년 후, 그는 그 모호함을 버리고 “사실, 이것은 여성이 남자의 목에 입을 맞추는 것뿐”이라고 솔직하게 밝히기도 했다.

‘병든 아이 I The Sick Child I’, 1896, 종이에 석판
‘병든 아이 I The Sick Child I’, 1896, 종이에 석판

뭉크는 자신의 누이 소피에가 극심한 고통을 겪다 사망하는 것을 목도했다. 이렇게 엄청난 트라우마적 사건을 겪으며, 그 기억으로 <병든 아이> 작품이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내용들은 작품 안에 표현됨으로써 관람자 자신의 경험과 공포를 대체한다는 점에서 인기가 높아졌다. <병든 아이>는 뭉크의 기억 속 이미지와 작가의 삶 전체를 통틀어 그의 주요 작품 중 하나로 따라다니게 될 현대적인 주제를 표현한다.

‘마돈나 Madonna’, 1895/1902, 종이에 석판
‘마돈나 Madonna’, 1895/1902, 종이에 석판

1890년대 중반, 에드바르 뭉크는 치명적인 여성과 연약한 여성을 하나의 그림에 결합하여 19세기 미술의 전형적인 여성상을 종합한 ‘마돈나’라는 주제를 실험적으로 다루었다. 다섯 개 버전의 회화 외에도 동판화와 흑백 석판화, 그리고 이후 다색 판화도 제작했다. <마돈나>의 모호함과 복잡성은 서로 다른 근본적인 개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러한 묘사에 담긴 다양한 유형의 혼합은 19세기 여성 이미지의 분열된 모습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프레임의 모티프뿐만 아니라 기대서 있는 모습, 휴식과 움직임, 드러냄과 감추기 등의 요소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로틱하면서도 황홀한 양면성을 보여 주는 누운 자세, 무용수 또는 인어처럼 서 있는 자세, 그리고 임신과 출산의 지표인 태아의 골격과 정자의 형상이다.

※본 글은 <에드바르 뭉크>(울리히 비쇼프)와 전시 보도자료를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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