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사리 공기 속 먼지가 되어버릴 수 있는 예술작품에는 시적인 면이 있다.”(Nicolas Party, 2022년)
화가는 종종 눈과 눈의 속임수로 작업을 한다. 우리가 보는 것, 우리가 본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거대한 마법일지 모른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 속에서 나무, 덤불, 구름처럼 구체적인 대상을 인식하고, 그것이 우리가 모양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바뀌면서 마법은 캔버스 위에서 현실이 된다.
화가는 그리는 것과 보는 것 사이를 오가며 영원한 마법의 순간을 찾아내지만, 자연에 마법의 순간은 없다. 자연의 언어는 생성과 소멸이다. 자연에서 마법을 찾자면 그것은 반복이다. 자연은 완벽한 무엇이 아니며, 반복을 통해 진화하는 수선공이다.
영원히 변치 않는 마법의 순간은 없다. 자연의 흐름 앞에 인간의 인식은 공기 속의 먼지와 같은 존재다. 그림에서 대상의 형체가 뚜렷해질수록, 그 대상은 쉽사리 공기 속 먼지가 되어버린다는 것만 두드러질 뿐이다. 니콜라스 파티는 ‘먼지로 이루어진 환영’을 만드는 작가다. 파티가 주로 사용하는 ‘파스텔’은 마치 ‘나비 날개의 인분(鱗粉)처럼’ 쉽사리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파스텔은 지극히 연약하고 일시적인 재료다. 파티는 파스텔화를 ‘먼지로 이루어진 가면’에 빗대며, 마치 화장과 같이 파우더로 덮인 환영을 만든다.
호암미술관은 파스텔화의 동시대적 가능성을 확장하는 스위스 작가 ΄니콜라스 파티΄의 최대 규모의 서베이 전시 <더스트>를 지난달 31일부터 내년 1월 19일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기존 회화 및 조각 48점, 신작 회화 20점, 그리고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파스텔 벽화 5점을 리움의 고미술 소장품과 함께 선보인다.
파티는 고대부터 근·현대를 아우르는 미술사의 다양한 작가, 모티브, 양식, 재료 등을 자유롭게 참조하고 샘플링하며 그만의 독자적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특히 그는 18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이후 잊힌 파스텔화를 소환하여 풍경, 정물, 초상 같은 회화의 전통 장르를 재해석한다. 선명한 색, 단순한 형태, 생경한 이미지가 어우러진 그의 작품은 친숙한 듯하면서도 쉽게 파악되지 않으며, 가벼움과 심오함, 유머와 진지함 사이를 넘나든다.
전시 제목 ‘더스트’는 파스텔 고유의 특성을 회화적 재현의 주된 방식이자 주제로 받아들이는 파티의 작품세계와 연계된다. 미술관 벽에 직접 그리는 거대한 파스텔 벽화는 전시 동안에만 존재하고 사라지는 운명을 지닌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이러한 파스텔의 존재론적 불안정성을 인간과 비인간 종(種), 문명과 자연의 지속과 소멸에 대한 사유로 확장한다.
이번 전시를 위해 파티는 리움미술관의 고미술 소장품을 참조하고 그의 작업과 함께 병치하며 시대와 문화를 넘나드는 대화를 촉발한다. 생명 탄생과 예술의 기원을 담은 거대한 <동굴> 앞에 조선시대 <백자 태호>를 병치하고, 지구상에서 멸종된 종을 손바닥 만한 동판에 온순하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담아낸 <공룡> 연작은 <청동운룡문 운판>에 재현된 상상의 동물이자 불법을 수호하는 용(龍)의 이미지와 만난다.
〈산〉 벽화는 수채화처럼 부드럽고 안개 낀 산을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구름과 안개를 여백으로 표현한 동양의 산수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동양적인 〈산〉 벽화는 고려시대 만들어진 〈금동 용두보당〉과 함께 신비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은 옛 사찰 입구에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거나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을 알리기 위한 깃발을 달아 놓았던 높은 기둥인 당간을 미니어처로 만든 것이다. 당간의 꼭대기는 활달하고 호기로운 모습의 용 머리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한국에서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지는 용은 신화, 설화, 불교, 민간신앙 등에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악한 것을 물리치고 국가와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오랫동안 숭배되었다.
장생과 불멸의 염원을 담아내는 조선시대 <십장생도 10곡병>과 김홍도의 <군선도> 속 다양한 상징들을 재치있게 샘플링하여 상상의 팔선(八仙)을 형상화한 신작 초상 8점을 선보인다. 금박으로 덮인 아치형 프레임에 담긴 초상은 사슴과 학, 당나귀 등으로 몸이 대체되어 있거나, 개를 머리카락 삼기도 하고, 복숭아와 연꽃이 가득한 화면으로 스며들어 신비로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인간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파티의 신비로운 사계 풍경은 해, 구름, 소나무, 불로초가 있는 십장생도의 도교적 이상향과 조우하며, 르네상스 이후부터 쇠퇴의 메타포로 그려진 <폐허>의 이미지는 기후 위기를 연상시키는 <붉은 숲>과 잿빛 <구름>과 연결을 이룬다. 이를 통해 파티는 낭만주의적 숭고와 재난의 이미지를 교차시키고, 재현의 역사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