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 [강태운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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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 [강태운의 빛과 그림자]
  • 강태운 미술칼럼니스트
  • 승인 2024.08.26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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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千鏡子, 1924~2015)는 대화하다 말고 자주 침묵했다. 시선은 먼 곳을 향했고, 눈동자는 눈앞의 변화에도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이었다. 침묵은 그나마 나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삶에 치일 때면, 광주역 앞 뱀집에 앉아 뱀을 스케치했다. 두 살배기 딸과 첫돌이 안된 아들을 남기고 남편은 요절했고, 6·25 전란 통에 여동생마저 폐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천경자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뱀을 그렸다. 그리면서 징그러워 몸서리쳤다. 고통을 잊으려고 선택한 끔찍한 자극이었다.

천경자는 그때 처음으로 뱀의 눈을 자세히 보았다. 뱀의 눈은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이 “개구리 새끼의 눈처럼 둥글둥글, 오히려 사랑스러운 인상”이 들었다. 징그럽고 무서우리라 생각했던 그 눈에서 자신이 평생 떨치려고 했던 슬픔과 그리움이 느껴졌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전설의 슬픈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아요”. 천경자에게 뱀은 분신이었고, 고통은 동행이었다.

천경자는 자신을 투사한 듯한 여인을 자주 그렸다. 그 여인은 바라보는 사람을 한동안 서 있게 만든다. 여인의 눈빛은 누군가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다. 시선의 방향이 역류하여 자기 내면을 무상하게 바라보는 것 같다. 좀처럼 말이 되지 못해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바라보는 눈빛이다. 마음속에 가득했지만, 알지 못했던 감정은 무늬처럼 압축된 그림으로 남아 마음속에 새겨져 있었다. 침묵은 눈앞의 상황을 마음속에 새겨진 그림과 맞추는 묵언의 과정이었다. 천경자는 침묵 속에서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천경자 화백은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다. 한국 채색화 분야에서 독자적인 화풍과 양식으로 후대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작가는 활동 초기부터 ‘자유로운 창작과 개성’을 중시해 자신의 작품을 동양화, 한국화라는 틀에 가두지 않았다. 채색화는 곧 일본화라는 당시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남다른 감수성과 감각으로 유년기의 기억, 음악, 문학, 영화에서 받은 영감, 연인과의 사랑과 고통, 그리고 모정을 개성적인 필치로 그린 진정한 모더니스트였다는 점에서 다른 작가들과 차별점을 갖는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2층에서 천경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 전시회가 지난 6일부터 열리고 있다. 작가의 기행 회화를 중심으로 자신만의 길을 걸었던 천경자 작가의 인생 전반과 작품 세계를 조망한다. 전시의 제목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는 작가가 1986년 저술한 여행 수필의 제목으로, 한곳에 머물지 않고 경계 없이 이동하는 ‘바람’이라는 소재를 통해 심리적, 물리적, 지리적, 문화적으로 경계 없이 넘나들며 자신만의 길을 걸었던 천경자의 인생 전반과 작품 세계를 은유한다.

이번 전시는 ‘환상과 정한의 세계’, ‘꿈과 바람의 여로’, ‘예술과 낭만’, ‘자유로운 여자’ 등 네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30점의 작품이 출품된다. 그중 19점은 오랜 기간 대중에게 전시되지 않았던 소장품들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다.

‘환상과 정한의 세계’는 천경자의 화려하고 몽환적인 채색화와 특유의 여인상 작품 위주로 구성된다. 작가는 작품에서 자신과 주변 세계를 환상과 꿈의 세계로 전환하여, 정한(情恨)을 표현하고 현실과 내면의 세계를 넘나든다.

‘꿈과 바람의 여로’는 천경자가 세계 곳곳을 누비며 마주한 이국적인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기행 회화로 구성된다. 작가는 당시 시대적으로 쉽지 않았던 해외여행을 통해 작품의 소재는 물론 자기 내면과 작품 세계를 확장해 나간다.

‘예술과 낭만’은 해외 문학과 공연 등 문화예술에 대한 천경자의 관심과 사색이 드러난 작품 위주로 구성된다. 작가는 해외여행 중 자신이 애호하는 문호의 생가나 문학 속 배경이 되는 장소를 방문하여 그에 대한 인상을 작품에 표현한다.

‘자유로운 여자’는 일종의 아카이브로서 작가가 저술한 수필집과 기행 문집 등으로 구성된다. 천경자는 문학과 미술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신만의 감각이 묻어난 문체로 자기 삶의 서사나 기행에 대한 감상을 표현한다.

천경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준비된 또 다른 기획전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은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 시기에 태어나 민주화 사회를 맞이하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천경자 포함 한국 여성 작가 23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살펴보는 전시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3층에서 11월 17일까지 열린다.

‘여인들’ (1964)
‘여인들’ (1964)

〈여인들〉(1964)은 자전적 요소가 두드러지면서 자유로운 변용과 환상적인 분위기로 전환되는 시기의 작품이다. 수틀 앞에 하늘빛·보라빛 옷을 입은 세 여인이 앉아 있고 머리에는 면사포를 쓰고 있다. 여인들 앞에는 흰나비와 꽃무리가 있고 수틀 아래 붕어들이 맴돌고 있는 형상이다. 1960년대 초중반은 천경자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작품 속 여인들은 한결같이 면사포를 쓰고 있다. 면사포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신부에 대한 환상과 동시에 욕구불만의 표출이기도 했다. 평면적이고 간결한 형태 해석, 자유롭고 활발한 붓의 율동감, 힘찬 선의 흐름이 화폭을 지배하고 있다.

‘사군도’ (1969)
‘사군도’ (1969)

원제목은 〈향미사(響尾蛇)〉다. 향미사는 살모사과에 딸린 독사(毒蛇)의 하나로 방울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m 정도 길이의 누른 녹색 빛의 몸으로, 등 쪽은 어두운 갈색에 커다란 마름모꼴의 반문이 있다. 1950년대 초에 뱀을 그린 후 다시 뱀을 소재로 그린 작품이다. 6월 1일 자 한 신문 기사 <천경자 전을 보고>에서 최순우는 이 작품에 관해 “꽃뱀 대작(大作) 작품(作品) 〈향미사〉는 이제 바야흐로 생(生)의 지각(知覺)과 해학(諧謔)과 멋의 아름다움을 모두 체득(體得)한 산전수전 다 겪은 어느 인간(人間)의 화신(化身) 같은 경지(境地)라는 감흥을 느끼게 해주었다”라고 평했다.

‘초원’ (1973)
‘초원’ (1973)

〈초원〉은 아프리카에서 받은 인상을 집약해 동물, 식물, 인간이 공존하는 원시적 생명감과 아름다움을 담은 작품이다. 천경자는 아프리카를 담은 <초원> 시리즈에 대해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고 미래의 세계를 상상하며 오늘의 꿈을 담은 한 폭의 드라마들이에요. 그 속엔 내 슬픈 생애의 다면(多面)이 숨 쉬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화병이 된 마돈나’ (1990)
‘화병이 된 마돈나’ (1990)

〈화병이 된 마돈나〉(1990)는 유명 스타를 소재로 그린 작품이다. 천경자는 1960년대 후반부터 자신이 좋아했던 유명 스타를 화폭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환상 속에 표상되었던 여인이 아니라 현재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여인들이다. 여배우 이미지 삽입은 인간의 정신적 욕구불만에 대한 도전을 표출한 것이다. 꽃을 가득 꽂은 화병에 매혹적인 마돈나의 얼굴은 사실적으로 묘사됐지만 눈망울에 우수가 가득하다. 화면에서 느껴지는 신비감은 한결 다듬어진 붓 터치와 색채에서 비롯된다. 표정에서 느껴지는 애상은 여성이라는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지 못한 유명 스타의 삶에 천경자 자신의 한을 대입시킨 것이다.

※본 글은 <나는 사랑을 걱정하지 않는다> (강태운),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 전시 보도자료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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