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은 영풍과의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지난달 23일까지 1조8000억원 규모의 자사주 공개 매수를 마무리했다. 그런데 최윤범 회장은 자사주 공매 매수 후인 지난달 말 대대적인 유상증자를 발표했으며, 이에 대한 투자자와 여론 비판이 들끓었고 금융당국도 발목을 잡았다. 자사주 공개 매수 신고서에는 경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재무적 의사결정이 없을 것이라고 했으나, 최근 발표한 2조5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 추진은 증권신고서 허위 기재가 되고 말았다. 당연히 금융당국은 신고 내용을 정정하라고 지난 6일 요구했다. 고려아연 최윤범 회장의 3세 승계를 지키려는 계획에 커다란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이 결과 고려아연은 유상증자를 철회한다고 지난 13일 공시할 수밖에 없었다. 무려 1조8000억원의 자사주 공개매수로 인한 대규모 자금 유출은 고려아연에 단기간 재무적 부담을 줄 것이 뻔하므로, 유상증자로 이를 보완하려던 계획은 수포가 되고 말았다. 고려아연이 유상증자를 철회한 후 경영 상황을 평가한 한국기업평가는 고려아연을 신용등급 ‘부정적 검토’(Negative Review) 대상으로 등록한다고 지난 20일 발표했다. 여러 가지 정황에 비추어 자사주 공개매수 전 막대한 배당가능이익으로 추진하므로 재무 상황은 끄떡없을 거라고 장담하던 고려아연 스스로, 또 외부 신용 평가 기관도 대규모 자사주 공개매수로 문제가 불거질 것을 어느 정도 인지할 수 있었음이 틀림없다.
소송과 고발 등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이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그러나 세상사는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어 하나의 파문이 엉뚱한 곳에 예상치 않은 기회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언론에서 의미 있게 다루지 않았지만, 최윤범 회장의 3세 승계가 배경인 고려아연의 경영권 분쟁은 또 다른 3세 경영 승계가 진행 중인 한화그룹에 기회를 제공했다는 생각이다. 과거 고려아연 최윤범 회장은 (경영권 분쟁을 대비해서인지 모르지만) 자사주 교환을 통해 다수 기업과 전략적 제휴 관계를 형성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한화그룹이며 2022년 11월 고려아연은 1568억원(543만6380주)에 상당하는 한화그룹 지주회사인 한화 자사주를 고려아연 자사주와 교환했다.
애초 두 회사는 내년까지 3년간 보유 제한을 자율 협약했으나 최근 재무 상황이 악화된 고려아연이 자금확보를 위해 보유 제한 해제를 협의하고 한화 지분을 한화그룹에 매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교롭게 금융감독원이 유상증자 증권신고서 정정을 요청한 날인 지난 6일에 한화 주식을 한화에너지가 매수했다. 장외거래로 매각한 가격은 한화에너지가 지난 7월 공개매수한 한화 주식가격 3만원 이하인 2만7950원이었으며, 자사주 교환 가격 2만8850원보다도 낮은 가격이다. 언론 등이 고려아연의 공개매수와 재무개선에 초점을 두면서 이번 장외거래는 지나치는 분위기다. 그러나 한화그룹에 있어서 해당 거래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고려아연의 한화 지분을 인수한 한화에너지는 한화그룹 총수 김승연 회장의 세 아들(김동관 50%, 김동원 25%, 김동선 25%)이 100% 지분을 보유한 기업이다. 한화가 아닌 한화에너지가 고려아연의 한화 지분을 인수하면서 김승연 총수의 지분은 7.25%포인트 증가해서 56.01%로 높아져 그룹 지배력을 강화했다. 특히 세부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 거래가 한화그룹에 의미가 있는 것은 3세 승계 후계자로 예상되는 김동관 부회장의 실질적 한화그룹 장악력이 커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김동관 부회장이 50% 지분으로 경영을 지배하는 한화에너지의 한화 지분율 22.16%와 김동관 부회장 개인의 한화 지분 5.43%를 합하면 김동관 부회장의 실질 지분율은 27.59%로 김승연 회장 지분율 22.65%를 넘어선다.
결국 한화가 아닌 비상장 기업 한화에너지가 과거 한화 자사주를 인수하면서 한화그룹은 절묘한 자사주 마법을 선보였다. 먼저 한화가 2022년 반기보고서에 보유한 것으로 공시한 자사주 중 약 82%인 543만6380주를 고려아연과 전략적 제휴 명목으로 교환하자, 의결권이 없던 자기주식이 우호 지분으로 살아났다. 다음으로 자사주 교환에 의한 간접적인 의결권 확보 상태가 내년까지 지속될 뻔했으나 고려아연의 재무 상태 악화로 1년이나 빨리 보유 제한이 해제되어 조기에 한화 지분을 한화그룹은 매수했다. 매수 주체를 한화가 아닌 한화에너지로 선택한 점이 신의 한 수였다. 결국 고려아연으로부터 한화 자사주 회수 거래를 통해 한화그룹은 기한의 이익을 보는 것은 물론, 김동관 부회장 3세 경영을 거의 완성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시장에서는 김동관 부회장의 3세 승계 완성을 위해서는 한화와 한화에너지의 합병을 추진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편 한화그룹이 한화-한화에너지 합병을 통한 3세 승계에 본격 착수했다는 징후는 예사롭지 않은 인사에서도 단서를 추측할 수 있다. 지난 3분기 보고서 기준 한화에너지에 4년 5개월째 사외이사로 근무하며 내부거래 위원장과 ESG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경수 전 고검장은 딜로이트안진 회계법인 변호로 삼성물산 합병에 깊이 관여한 인물로 알려진다. 그는 삼성그룹 국정농단 재판 과정에서 준법 감시 평가 위원으로도 참여했고, 올해 삼성물산 사외이사로 선정되었는데 삼성물산 합병 관련 2심에서 자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삼성물산 합병 경험을 바탕으로 김경수 사외이사는 어쩌면 한화에너지를 중심으로 하는 한화그룹 지배구조 개편에 자문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고사에 ‘견토지쟁’(犬免之爭)이라 했다. 개와 토끼가 쫓고 쫓다가 지친 사이 농부가 잡아 불로 소득으로 얻는다는 얘기다. 영풍과 고려아연이 다투는 사이 한화그룹은 절호의 3세 승계 토대를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너무 흥분한 나머지 김동관 부회장은 사법부와 악연을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부디 김경수 사외이사의 노하우가 삼성그룹 사례를 추종하기보다는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는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