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 세상이 우리에게 이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내게 깊은 울림을 주는 아인슈타인이 남긴 심오한 말이다. 물리학자들은 수학의 형태로 표현되는 물리법칙이 우주의 실재를 온전히 기술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사실일까? 우주를 기술하는 궁극적인 물리법칙이 우주의 한구석에 놓인 이 작은 행성 지구의 물리학자들이 생각해 낸 수학으로 표현되어야 할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까? 비트겐슈타인의 얘기처럼 우리가 가진 언어의 한계가 우리 앎의 한계라면, 궁극적인 실재의 극히 작은 일부만이 인간이 여태껏 찾아낸 수학과 물리학의 언어에 포착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짐작도 할 수 없는 방대하고 심오한 진리가 여전히 인식의 지평 저 너머에 펼쳐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저 너머에 놓인 궁극의 진리는 밝은 빛에 가까울까, 아니면 칠흑같이 어두운 심연에 가까울까? 수학과 물리학이 계속 발전한다면 결국 우리는 그곳을 볼 수 있을까? 그곳에 도달하는 것이 결국 우리 모두를 파국으로 몰아넣을 위험이 있다면 어떨까?
뱅하민 라바투트의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정말 묘한 책이다. 소설 같지만 그렇다고 딱히 소설로 분류하기는 어렵고, 20세기 과학의 역사를 다룬 책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소설 같은 책이다. 한 평론가의 말처럼 라바투트는 이 책으로 문학과 과학과 역사가 함께 어우러진 완전히 새로운 장르를 창조했다.
책을 관통하는 색은 파란색과 푸른색이다. 가을하늘은 파랗고 나뭇잎은 푸르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신호등의 녹색등을 파란불이라고 하듯이 책의 저자도 파란색과 푸른색을 딱히 구별하지 않는다. 기독교 종교화에서 성모의 아름다운 파란색 옷을 표현하는 안료로 1709년 처음 이용된 화학합성 물질인 프러시안블루에 얽힌 이야기로 책의 첫 장이 시작한다. 우리나라에서 독성이 강한 독약의 대명사로 쓰이는 청산가리처럼 프러시안블루도 시안화물이다. 시안화수소 HCN은 물에 녹으면 파란색(青)을 갖는 산(酸)성 용액이 되어서 일본에서는 칼륨을 뜻하는 가리와 결합해 시안화칼륨을 청산가리라고 불렀다.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어두운 면도 가진 시안화물의 푸른색처럼 책에는 두 상반된 개념의 공존과 모순이 여기저기 등장한다. 광기와 이성, 앎과 파국, 진실과 심연은 마치 두 입자가 진공에서 함께 짝을 이뤄 생성되듯, 같은 얘기가 담고 있는 상반된 모습이다. 이 책 자체도 그렇다. 이 책은 논픽션 소설이자 픽션 과학책이다. 세상의 진실은 하나이자 모순이다.
1장 ‘프러시안블루’의 주연인 프리츠 하버는 1차 대전 당시 수많은 프랑스 군을 죽인 염소가스 살포 책임을 맡았으며 2차 대전 때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 이용된 치클론B를 개발한 유대인 과학자다. 프리츠 하버는 공기 중 질소를 추출하는 방법을 찾아내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화약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기아에서 구한 질소 비료의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1장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하버가 남긴 가상의 편지를 소개한다. 많은 사람을 죽여서 아내조차 실망과 좌절로 자살하게 만든 자신의 행위에 대한 죄책감이 아니라, 자신의 질소 추출법으로 지구의 자연적 평형이 교란되어 인류 대신 식물이 세계를 차지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편지에서 토로한다. 결국 식물의 무한 증식으로 지구의 모든 생명이 끔찍한 초록 아래 질식사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다. 스페인어로 쓰인 이 책의 원제목 ‘Un Verdor Terrible’은 영어로는 ‘A Terrible Greeness’다. 하버가 편지에서 적은 바로 그 끔찍한 초록이다. 아름다운 프러시안블루에서 맹독성 시안화물을 거쳐 인간이 사라진 식물의 끔찍한 세상의 상상까지, 1장은 파랑에서 시작해 초록으로 끝난다.
두 번째 장인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은 아인슈타인의 논문이 출판되고 한 달 정도의 짧은 기간 안에 독일군 참호에서 일반상대성이론 장방정식의 해를 처음 구한 슈바르츠실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슈바르츠실트는 모든 질량이 한 점에 집중되어 밀도가 무한대로 발산하는 특이점의 존재를 일반상대성이론으로부터 도출해 낸다. 특이점은 어떤 경고도 발하지 않으며 한번 넘어서면 무지막지하게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한계다. 슈바르츠실트는 모든 물질이 한 점에 모여 파국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듯이, 인간 수백만의 정신이 하나의 정신 공간에 압축되어 하나의 목적에 동원되는 것이 가능하며 바로 지금 자신의 조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확신에 이르게 된다. 슈바르츠실트를 사망에 이르게 한 병은 사실 자가면역질환이지만 저자는 이 병의 원인이 몇 달 전 벌어진 독가스 공격일지 모른다는 상상을 책에 적는다. 1장의 하버와 2장의 슈바르츠실트를 연결하는 치밀한 기법이다. 하버의 시안화물 독극물은 이후에도 연이어 책에 등장한다. ‘심장의 심장’에서 수학자 그로덴디크의 무정부주의자 부친을 아우슈비츠에서 죽인 것도 같은 독극물이다. 이어지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에서는 슈뢰딩거가 요양소에서 만난 헤어비히 박사의 딸이 진드기 살충제로 유리 단지가 강렬한 파란빛으로 물들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것도 당연히 책을 관통하는 파란색의 이미지를 가진 시안화물 독극물 얘기다. 내가 저자의 후기 혹은 ‘작가의 말’로 읽은 책의 마지막 부분인 ‘밤의 정원사’에도 두 마리의 개를 죽인 독극물 얘기가 나온다. 시안화물 독극물의 흔적과 단서가 책의 여러 부분을 파랑과 푸름의 상징색으로 엮는다.
책에서 가장 큰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책의 제목과 같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부분이다. 다른 곳과 달리 ‘헬골란트의 밤’, ‘공작의 파동’, ‘귓속의 진주’, ‘불확실성의 왕국’, ‘신과 주사위’, 그리고 ‘후기’의 세부로 나뉘어 있는 이 부분에서 저자는 양자역학의 태동기를 광기, 환각, 갑자기 찾아오는 이해의 순간과 이해가 보여주는 심연의 모습으로 엮어 기술한다. 하이젠베르크는 꽃가루 알레르기로 고생하다 요양차 방문한 헬골란트섬에서 오로지 직접적인 관찰 결과만을 바탕으로 양자계를 수학적으로 모형화하는 방식을 어느 날 밤 돌연히 완성해 낸다. 한편, 데카르트는 자신 철학의 토대인 제1원리 ‘회의하는 바로 그 순간 나는 회의하는 주체인 나의 존재를 회의할 수는 없다’라는 것을 1619년 11월 10일 여행 중 숙박한 한 여관의 난롯방에서 돌연 깨닫는다. 나는 인류의 지성사에서 불현듯 등장한 결정적 깨달음의 두 순간으로 하이젠베르크의 ‘헬골란트의 밤’과 데카르트의 ‘난롯방의 사색’을 꼽고는 한다. 1925년 6월 어느 날 하이젠베르크의 헬골란트의 밤으로부터 딱 100년이 지난 올해는 유엔이 지정한 세계 양자과학기술의 해다. 올해 6월 작은 섬 헬골란트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학술 행사가 열렸다.
과학의 발전에 대한 저자의 경고를 명확히 드러내는 문장이 ‘심장의 심장’ 부분에 등장한다. 작가는 그로텐디크의 입을 빌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산산 조각낸 원자들을 분열시킨 것은 장군의 번들거리는 손가락이 아니라 한 줌의 방정식으로 무장한 과학자 집단”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에서 하이젠베르크가 술집에서 만난 사람도 비슷한 얘기를 들려준다. “이 어마어마한 지옥이 당신 탓이 아니라면, 당신 같은 사람들 탓이 아니라면 누구 탓이겠습니까? 이 모든 광기가 어디서 시작됐지요? 언제부터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춘 겁니까?”라는 문장이다. ‘밤의 정원사’에서 정원사는 “수학이 세상을 무시무시하게 변화시키리라”라는 깨달음을 피력하기도 한다. 인간의 무분별한 지식 추구에 대한 작가의 경고는 ‘밤의 정원사’에서 비유의 형태로 확연히 드러난다. “레몬 나무는 열매를 너무 많이 맺는 바람에 쓰러져 죽는다”라는 문장이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과학의 궁극적인 목표가 결국 우리 모두를 파멸과 심연으로 이끌 것이라는 경고가 담긴 작가의 섬뜩한 비유다.
이 책은 진실이라는 어두운 심연을 발견한 과학자들의 이야기다. 파괴적인 자학과 광기는 이들 과학자의 집중을 이끌어 놀라운 과학적 발견을 견인했지만, 이렇게 드러난 진실은 발견의 기쁨과 함께 그 바닥에 놓인 심장이 가진 어두운 심연을 보여줬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일반상대성이론의 특이점이라는 심연, 양자역학이 보여준 세상의 심장에 놓인 시커먼 불확실성의 심연, 수학적 우주에 놓인 심장의 심장이라는 심연. 이 놀라운 논픽션 소설은 답 없는 숱한 질문으로 나를 이끈다. 심장의 심장에도 심장이 있을까? 세상에 대한 궁극적 이해라는 과학의 목표는 타당한 것일까? 결국 우리는 이해의 끝에서 모든 심연의 심장을 보게 될까?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는 것을 멈춰야 할까?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눌 주제
1. 이 책은 묘하게 감동적이고 아름답습니다. 도대체 감동의 근원이 무얼까요?
2.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어떤 의미일까요?
3. 저는 이 책의 다른 제목으로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바꿔야 할 때”를 떠올렸어요.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4. 하버의 연구는 기아 해방과 생명 몰살의 양면성이 있습니다. 양면성의 미래 가능성이 있는 과학 연구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인류를 위해 금지해야 하는 과학 연구의 기준을 정할 수 있을까요?
5. 세상에 대한 궁극적인 이해는 불가능할까요? 궁극적인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인간을 파국으로 이끌까요?
6. 전쟁, 기존 세계의 붕괴, 독극물과 죽음. 어두운 이해 불가능의 심연 등이 자주 등장합니다. 저는 요즘 AI의 빠른 발전으로 도래할 수도 있는 특이점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런 어두운 심연이 우리를 삼킬까요? 삼켜진 다음에 보게 되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