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과거에서 흘러와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간다. 과거는 이젠 없는 시간이고, 미래는 아직 없는 시간이다. 과거는 기억으로 존재하고, 미래는 기대로 존재한다. 과거를 기대할 수 없고, 미래를 기억할 수 없다. 나는 앞의 말에 오류가 없다고 믿지만, 미셸 들라크루아(Michel Delacroix, 1933~) 그림을 볼 때면 이런 논리적 접근이 허망하게 느껴진다. 미셸 그림 앞에 서서 나는 과거를 기대한다.
세월이 흐르면 세상도 변한다. 사람도 사랑도 거리도 변한다. 첫사랑 기억이 아련하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은 순수하게 가장 많이 좋아했기 때문이다. 되돌릴 수 없어 더욱 애틋하다. 그래서 사람에게 가장 순수한 건 기억일지 모른다. 미셸은 어린 시절에 겪은 파리의 아름다운 기억을 50년 넘게 그렸다. 미셸에게 행복한 어린 시절은 인생에서 최고의 시작이었다. “내 그림의 90%는 기억에서 나온 것입니다.” 미셸은 과거를 기대한다.
미셸 들라크루아는 1933년 파리 14구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1930년대 후반 파리는 ‘벨 에포크’(Bell epoque, 1890년대)를 이어 여전히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파리 거리에 대한 미셸의 묘사는 몽파르나스 지역의 다채롭고 유명한 주민들을 관찰하면서 보냈던 그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미셸이 살았던 몽파르나스에서 학교가 있던 노트르담 성당 주변까지 거리를 매일 걷고 보면서 축적된 풍경들이다. 미셸은 공원이나 거리 카페에서 스케치에 열중하던 당대 최고 예술가들을 보며 꿈을 키웠다. 피카소, 브라크, 후지타, 샤갈 같은 예술가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자랐다는 자체가 감동이었다.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계엄령을 선포한 일은 프랑스 국민에게는 끔찍한 일이었지만, 어린 미셸에겐 하나의 모험이었다. 미셸은 파리의 거리를 탐험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단순한 사람들을 보았다. 이들은 오늘날까지 작가에게 파리를 구현하는 사람들이자, 미셸의 작품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다. 건물의 창문 사이로 이불을 털거나 밖을 쳐다보는 사람들, 비 오는 파리의 풍경, 거리에서 물건을 옮기는 마차와 장사를 위한 수레, 주말에 강변에서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 평화의 수호자로 불렸던 경찰들. 겨울 그림에는 눈싸움하는 아이들, 중절모와 붉은 목도리를 하고 우산을 쓴 채 지나가는 중년의 남성, 눈을 빗자루로 쓰는 사람, 석탄을 실어 나르는 수레를 끄는 사람, 마차를 몰고 가는 마부, 도시의 평화를 지키는 경찰, 가스등을 가는 사람, 벽난로에서 나온 굴뚝의 연기가 등장한다. 1930년대 옛 파리의 생활상을 집약한 공간으로 파리지앵들의 소박한 일상을 엿볼 수 있다.
현실의 풍경이 각자 하나의 의미로 굳어질 때, 풍경은 자신의 표정을 잃고 변해간다. 사람도 사랑도 거리도 변했다지만 가장 많이 변한 건 내 자신이다. 온전한 그릇으로 거듭나려면 일정 이상의 온도를 견뎌야 한다. 나를 한계 너머까지 밀어붙이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왜곡되고, 소중한 목소리는 하나둘 지워진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는 어떤 상상도 싹트지 않는다. 1970년대 초 어느 날, 불혹(不惑)의 미셸은 설명할 수 없는 영감을 받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 들라크루아만의 거리 풍경을 그렸습니다. 오늘날에도 거의 같은 그림입니다.” 미셸은 단순하게 살고, 열심히 일하고, 행복했던 그 시대를 살고 싶었다.
미셸 들라크루아는 이제 긴 삶의 끝에 서 있다. 다른 사람들처럼 큰 만족, 몇몇 기쁨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슬픔, 때론 짊어지기엔 무거운 아픔을 겪었다. 오십 초반 출판사와 법적 싸움에 휘말렸고, 설상가상 힘든 이혼 과정을 겪었다. 스트레스는 신체적 질병으로 이어졌고 척추 골수에 낭종이 생겼다. 손가락과 손에 감각을 잃었다. 의사는 물론 주위 사람들이 절망할 때, 미셸은 포기하지 않았다. 살아야 할 이유가 너무 많았다. 그림은 평생 자신을 지켜준 친구였고, 가족은 삶의 이유이자 동력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신 안에는 사랑이 가득했다.
미셸은 오늘도 사랑하는 빛의 도시의 거리를 걸으며 풍경을 감상하고 어린 시절을 기대한다. 소소하고 재치 있는 삶의 순간들은 보석처럼 빛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속삭임에 마음이 움직인다면 당신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사랑에 빠졌다면 파리에 가야 한다. ‘미셸 들라크루아, 파리의 벨 에포크’로 떠나보자.
※ 본 글은 『Michel Delacroix : Once Upon a Time in Paris』 (Julie Keller)와 전시 보도자료를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