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하다. 겉으로는 찬반양론으로 나뉘어 건전한 논쟁을 벌이는 것처럼 보여도 조금 더 파고들면 실상은 전혀 다르다. 주식투자자는 대부분 격렬하게 반대하는 반면 ‘조세 정의’를 앞세우는 사람들은 금투세 도입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얼핏 생각해 보면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라는 논리를 내세우는 금투세 도입 찬성론자의 주장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더군다나 여야가 이미 2020년에 합의한 법안이고, 지난해 시행 예정이었다가 한차례 유예했던 만큼 이번만큼은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는 주장도 틀린 주장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금투세 도입을 둘러싼 찬반양론이 격화하면서 논의는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들을 정반대로 호도하는 주장까지도 심심찮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주장이 ‘금투세 도입에 가장 예민하게 반대하는 분들은 주가조작 세력이라고 생각한다’라는 국회의원의 발언이다. 1400만명에 가까운 주식투자자들 대부분이 금투세 도입에 반대하는데 그들을 어떻게 주가조작 세력으로 내몰 수 있다는 말인가. 금투세 유예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심지어 ‘금투세 유예를 주장하는 건 기득권자들의 궤변일 뿐’이라고 강변한다. 금투세 유예를 주장하는 주식투자자들이 어떻게 기득권자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말인가. 그야말로 궤변일 뿐이다.
금투세 강행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 야당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금투세 유예 내지는 폐지’ 주장이 점차 확산하고 있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이소영 의원이 ‘금투세를 둘러싼 문제의 본질’을 비교적 명쾌하게 설명한 데다 야당 최고위원조차도 금투세 유예 필요성을 조목조목 이치에 맞게 주장하고 나선 덕분이다. 이소영 의원은 대정부 질의에서 금투세 도입보다 더욱 시급한 선결과제가 ‘상법 개정’이라고 콕 짚어 주장해서 이목을 끌었다. 상법상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를 도입해야만 주주 침해를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참으로 옳은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수십 년 전부터 최근까지 그토록 오랫동안 지배 구조 개선을 외쳐댔지만, 지금도 여전히 이사회를 장악한 대주주는 소액주주들의 이익에 정면으로 반하는 결정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저지른다. 이런 일들이 특히 재벌 대기업을 중심으로 빈발하고 있으니 ‘롤렉스 찬 강도’와 진배없다는 말을 들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이 사라지지 않는 근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 발행,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불합리한 합병, LG화학 등의 쪼개기 상장, 두산밥캣을 둘러싼 터무니없는 합병비율 등등이 모두 ‘이사의 주주 충실 의무’ 규정이 갖춰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이다.
지금과 같은 열악한 국내 증시 환경에서 무리하게 금투세를 도입하는 것은 마치 비포장도로에서 통행세를 걷겠다는 태도와 마찬가지라는 주장도 등장했다. 참으로 적절하고 옳은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정곡을 찌르는 비유를 듣고도 여전히 막무가내식 반론은 거리낌 없이 등장한다. ‘한국 증시가 비포장도로라도 그 도로를 이용해 수익을 거뒀으면 세금을 내는 것이 맞다’라는 발언이 대표적이다. 이토록 막무가내식 반론을 쏟아내는 인물이 하필이면 야당의 정책위의장이라는 사실이 더더욱 놀랍다. 비포장도로 옆에 아우토반이 빤히 있는데도 비포장도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세금을 걷겠다고 나서면 그걸 감내하며 비포장도로를 계속 이용할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비포장도로를 정비하는 게 급선무가 아닐까. 금투세 유예를 둘러싼 통행세 논란을 들으니 문득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가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이 떠오른다.
한 사람은 부유하고 그 이웃은 가난한 것은 외출할 때 한 사람은 마차를 타고 그 이웃은 걸어 다니기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은 부유하기 때문에 마차를 탈 수 있고 그의 이웃은 가난하기 때문에 걸어 다니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 <국부론>
애덤 스미스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과연 그는 작금의 금투세 도입 논란을 보면서 어떤 말을 내놓았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다음과 같은 취지의 말을 내놓지 않았을까?
선진국 증시에서 금투세와 같은 제도들이 일찌감치 확립된 건 그 나라의 증시가 세금을 납부할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고 투자자 보호 제도가 완비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을 비롯한 몇몇 낙후된 증권시장에서는 세금을 부과하고 싶어도 그럴 여건이 안 되기 때문에 세금을 거둘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선진 증시에 비해 여러모로 투자 환경이 낙후된 이머징 시장에 머물러 있다. 코스피 지수만 보더라도 2007년 2000P를 넘어선 이후 무려 17년째 2000P대 박스권에 장기간 갇혀 있다. 2007년 고점(2064.85P)에서 따져보면 연수익률이 1.3%에 불과하다. 코스닥 시장의 기대수익률은 이보다 훨씬 처참하다. 2020년 이후 국내 증시에 대거 유입된 동학 개미들이 오죽 답답했으면 서학개미로 변신하겠는가. 국내 증시의 후진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제점이 이소영 의원이 정확하게 지적한 ‘이사의 주주 충실 의무’ 법 조항이 없다는 점이다. 지나치게 높은 상속세율로 말미암아 상속세 부담을 피하기 위해 청산가치보다 현저히 낮은 주가 저평가 상태를 일부러 방치하는 풍토 또한 커다란 문제다. 선진국 증시에 비해 턱없이 낮은 주주환원율,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하는 주가조작 사건이 빈발하는 것도 문제다.
이 모든 후진적인 증시 환경이 한국 증권시장을 비포장도로나 마찬가지인 척박한 상태로 내몬 셈이다. 이미 2~3년 전부터 동작 빠른 투자자들은 자금을 대거 빼내 미국 등 선진 해외 증시로 옮겨 투자하는 현상이 보편화되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금투세 강행론자들은 여전히 조세 정의만 부르짖고 있다. 그들은 심지어 금투세를 유예한다고 해서 한국 증시가 오른다는 보장이 있느냐는 식으로 문제를 호도한다. 아직 금투세를 시행하지도 않았는데 주가가 빠진 이유를 어떻게 금투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주장까지도 버젓이 내놓는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마차의 비유를 든 건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원인과 결과를 이토록 뒤바꿔 생각할 수 있는 걸까. 지금처럼 해외 증시로 투자 자금이 꾸준히 빠져나가 국내 증시가 점점 더 침체에 빠져든다면 그 피해는 국내 증시 투자자들뿐만 아니라 한국경제 전체로 파급될 수밖에 없다. 증시가 침체를 거듭하고 기업이 설비투자에 필요한 자금을 제때 조달하기 어려우면 기업의 투자는 위축되고 결국 일자리마저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본시장은 그저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자자들이 모여 주식에 베팅하는 도박장이 아니다. 2007년에 잠시 방한한 적이 있었던 와튼 스쿨의 제레미 시겔 교수는 <Stocks for the Long Run>이라는 책에서 주식시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주식시장은 자본주의의 본질 또는 투자가들이 경제의 미래에 대한 수익을 요구하는 곳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주식시장은 전 세계 자본의 배분을 추진하는 힘이며 경제성장, 기술 발전의 핵심 엔진이 된다. 전 세계적으로 주식시장이 점차 성장하고 또는 새로이 생겨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주식은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의 삶을 풍족하게 해줄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다.”
한 나라의 증시가 발전하면 그 나라의 경제도 같이 발전하고 그 나라 국민들의 삶 또한 풍족해진다.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어서 굳이 설명이 필요 없다. 한국 증시는 1956년 3월 개장 이래 지금껏 양적으로는 꾸준히 성장해 왔으나 질적으로는 선진국 증시에 비해 한참이나 뒤처진 형편이다. 그런데도 조세 정의만 앞장세우면서 금투세 도입을 강행해야 한다는 막무가내식 주장이 난무하니 투자자들의 불만은 쌓여만 간다.
이번 금투세 도입 논란을 지켜보는 투자자들이 특히 분노하는 대목은 ‘주식투자를 한 번도 안 해 본’ 사실을 자랑삼아 내세우는 인물들이 쏟아내는 한심스러운 주장들이다. 국내 증시 투자자들이라면 누구나 올해 총선 이후부터 가장 크게 우려해 온 점이 ‘금투세 도입에 따른 대규모 자금 이탈’이었다. 금투세 도입이 확정되면 큰 손 자금들이 대규모로 이탈하여 해외 증시나 부동산 시장 등으로 떠날 게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 우려가 추석이 지나도록 말끔히 해결되지 못한 게 한국 증시를 전 세계 꼴찌 수준으로 떨어트린 핵심적인 이유이다. 그런데도 금투세 강행론자들은 ‘금투세 탓’을 하는 투자자들을 도리어 주가조작 세력이나 기득권자로 내몰고 있으니, 이보다 답답한 일이 또 있을까 싶다.
대체로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을 미루어 짐작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도 그와 비슷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떤 로마인이 이혼한 사람에게 물었다. “부인이 정숙하지 않아서요? 아름답지 않아서? 아니면 자식을 못 낳았소?”. 그러자 이혼한 로마인은 자신의 신발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 신발은 멋지지 않소? 새것 아니오? 그러나 이것이 내 발 어디를 아프게 하는지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른단 말이오”.
금투세가 조세 정의에도 어울리고 선진국 증시에도 이미 정착된 제도라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그 새로운 제도가 1400만 투자자들을 얼마만큼 힘들고 아프게 하는지는 투자 경험조차 없는 사람이 알 턱이 없다. 아무쪼록 성급한 제도 도입으로 말미암아 뿔을 뽑으려다 소를 잡는다는 ‘교각살우’(矯角殺牛)만큼은 범하지 말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