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 쟁탈전이 시시각각으로 양상이 바뀌면서 그 파급 효과가 일파만파로 확산하고 있다. 75년 동안 이어져 온 동업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형국이니 어찌 거대한 소용돌이와 굉음을 동반하지 않을 수 있으랴마는 그 파열음이 결국은 자본 시장뿐 아니라 실물 경제에까지 악영향을 끼치는 게 아닐까 싶어 도리어 걱정스러울 정도다.
따지고 보면 장씨 가문과 최씨 가문의 공동 소유 및 공동 경영 체제가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마침내 균열을 일으킨 끝에 언젠가는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각자도생 국면’이 예상보다 조금 일찍 도래했을 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모든 동업 관계가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회자정리의 숙명’이 왜 이토록 요란스럽고도 거대한 싸움으로 변질되었는가는 한 번쯤 곰곰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장형진 고문과 MBK파트너스 측의 주장, 최윤범 회장 측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이번 갈등은 상대방이 먼저 원인을 제공했다고 믿는 듯하다. 수십 년 동안 고려아연에 대해 안정적인 지분을 유지해 온 장형진 고문 측에서는 최윤범 회장이 활발한 신사업 진출 등을 계기로 한화그룹, LG화학, 현대차 등과 발 빠르게 지분 맞교환을 진행하면서 최씨 가문에 우호적인 지분이 급격히 늘어난 게 갈등의 근본 원인이라고 판단한다. 최윤범 회장 측은 고려아연을 세계 제1의 비철금속 제련 기업으로 성장시킨 근본적인 원인이 최씨 가문을 중심으로 한 고려아연 경영진 덕분이라고 자부한다.
요약하자면 장씨 가문은 비록 최씨 가문과 오래도록 동업관계를 유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장씨 가문의 지분율이 압도적인 상태였으므로 ‘영풍 고려아연 그룹의 실질적인 주인’은 자신들이라고 굳게 믿어온 듯하다. 결국 압도적인 지분율 차이가 순식간에 대등한 관계로 돌변하자 당황한 장씨 가문에서 적대적 M&A의 상징인 MBK파트너스와 손잡게 된 핵심 동인으로 작용한 셈이다. 반면, 최씨 가문에서는 고려아연을 세계 굴지의 비철금속 제련 기업으로 성장시킨 주역이 자신들이니만큼 고려아연을 결코 MBK파트너스라는 약탈적인 자본에 빼앗길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두 가문의 주장은 제3자가 보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만큼 억지 주장은 아니다. 자본 시장의 논리를 따르자면 결국 지분경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쪽이 고려아연을 차지하는 게 지극히 당연하다.
정작 더 큰 문제는 싸움이 판가름 난 이후로 보인다. 패배하는 쪽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을 게 분명하다. 대체로 장형진 고문과 MBK파트너스가 승리하는 시나리오가 훨씬 더 나빠 보인다. 국가 기간산업이나 마찬가지인 세계 굴지의 비철금속 제련 기업이 금속 제련 사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약탈적인 기업사냥꾼의 손에 넘겨지기 때문이다. MBK파트너스가 고려아연 지분 경쟁에 뛰어들 때부터 줄곧 ‘중국 자본에 매각하는 일은 없다’라고 거듭 주장하지만, 그걸 담보할 수 있는 안전장치는 뚜렷이 갖춰진 게 없다. 소위 금융 자본이 산업 자본에 무방비로 뛰어들어도 마땅한 규제 장치가 없는 셈이다. 산업의 쌀이라고 불리는 아연뿐 아니라 납, 금, 은, 인듐 등 온갖 종류의 금속을 생산해 철강, 자동차, 반도체 등 산업에 안정적으로 공급해온 고려아연이 적대적 자본에 인수된 이후 기존 공급 체계가 흔들린다면 국내 산업뿐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에도 영향을 끼칠 게 틀림없다. MBK파트너스가 과거에 인수했던 홈플러스, BHC, ING생명 등의 사례와는 비교조차 하기 어려운 심대한 문제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온갖 문제를 일으킬지 모르는 셈이다.
당장 LG화학과 합작으로 완공한 2차전지 배터리 전구체 사업, 전해동박 사업, 니켈 제련 사업 추진에도 차질이 우려된다. 고려아연의 핵심 기술 인력, 협력 업체, 거래 업체뿐 아니라 고려아연 노동조합원들까지 상경해서 “MBK파트너스 인수 결사반대”를 외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울산 지역 정·재계뿐 아니라 국내 산업계와 정계, 호주 정·관계, 미국의 SAFE, 월스트리트 저널까지 나서서 ‘고려아연 적대적 M&A’에 우려를 표명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아시아 최대로 평가받는 MBK파트너스가 이제껏 M&A에 나섰던 여러 사례와 고려아연 쟁탈전이 그만큼 판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특별히 주목하는 것이다.
자본 시장에서 가끔씩 발생하는 적대적 M&A를 지켜보노라면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하는 듯한 살벌한 느낌도 든다. 승자에게는 경제적 이득뿐만 아니라 계량화하기 힘든 수많은 전리품이 뒤따르지만, 패자에게는 경제적 손실뿐 아니라 온갖 불명예와 비참함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고려아연 지분 쟁탈전에서 MBK파트너스가 승리하면 최윤범 회장을 비롯한 고려아연 경영진과 핵심 인력은 고려아연 경영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 최씨 가문 사람들은 75년째 이어온 영풍 고려아연 그룹 경영에서 결국 축출되고, 수십 년 동안 구축해 온 고려아연의 기업 활동은 급격하게 위축되고 다방면으로 흔들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온갖 분야에 걸쳐 악영향을 미칠 게 뻔한 시나리오보다는 차라리 최씨 가문이 승자가 되는 쪽이 공동선을 위해서는 그나마 최악을 피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국내 최초의 금속 제련소라는 명예보다는 온갖 환경 오염 문제와 중대 재해 사망 사고 등으로 대표이사가 둘이나 구속되는 등 불량 기업의 이미지만 더해가는 영풍 석포제련소가 다시금 되살아나 고려아연과 함께 번성하기를 기대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75년 동안 동업해 왔던 장형진 고문 측이 고려아연 지배권을 둘러싸고 최윤범 회장 측과 갈등을 겪은 끝에 MBK 파트너스와 손을 잡은 건 아무리 동업자에 대한 배신감이 컸다고 하더라도 두고두고 ‘잘못된 선택’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쟁탈전의 결말도 모른 채 벌써부터 이런 얘기를 꺼내는 건 물론 너무 성급한 판단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번 분쟁이 아무리 장씨 가문에 유리한 결과로 마무리된다고 하더라도 결국 장래에는 ‘승자의 저주’로 귀결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해 보인다. 지금 당장 장씨 가문에 최선의 시나리오는 결국 MBK파트너스가 공개매수에 실패하는 게 아니라 성공하는 쪽이다. 그러려면 MBK파트너스는 최소 1조2550억원 이상(고려아연 144만5036주·6.98%, 주당 75만원으로 매입할 경우 약 1조838억원, 영풍정밀 684만801주, 주당 25000원으로 매입할 경우 1710억원)을 쏟아부어 고려아연 지분을 인수한 다음, 장형진 고문 측 지분의 절반을 다시 MBK파트너스에서 넘겨받아야 한다. 장형진 고문 측에서 기대할 수 있는 장래의 이익은 MBK파트너스가 고려아연의 기업 가치를 최대한으로 증대시켜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비싸게 재매각할 때 자신들의 지분을 비싼 가격에 함께 떠넘기는 것뿐이다.
영풍과 MBK파트너스가 대규모 인수 자금 이자 비용 등 온갖 장애물을 모두 극복하고 고려아연의 지배권을 확보하더라도 고려아연의 기업 경영이 원활하게 이뤄질 가능성은 여전히 의문이다.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더라도 사모펀드에 인수된 이후 고려아연의 위상은 현재보다 도리어 나빠질 공산이 훨씬 더 크다. 단지 시세차익만을 추구하기 위해 세계 1위의 제련 기술을 보유한 기업을 강제로 빼앗고 우수한 경영 성과를 보여온 핵심 인력마저 이탈할 경우, 그 회사의 시장 내 지위와 평판은 급속도로 추락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장형진 고문 측이 MBK파트너스와 손잡고 고려아연을 되찾겠다는 순수한 기업 경영 마인드만이라도 버리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아쉬움도 남는다. 장형진 고문 측 입장에서는 베스트 시나리오가 전개되더라도 고려아연 지배 지분의 절반은 MBK파트너스에 넘겨야 하고, 나머지 지분에 대해서도 MBK파트너스와의 합의에 따라서만 처분이 가능한 처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의 표현대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왕국을 지키지 못하고 외세에 의존하는 국가는 온갖 비참한 굴욕을 맛볼 수밖에 없다. 장형진 고문 측은 자신의 왕국을 잃는 것뿐만 아니라 장씨 가문이 75년째 함께해 온 동업자를 배신하고 공동의 터전마저 외세에 넘겨주는 우를 범한 꼴이다. 장형진 고문 측의 고육지책에서 나온 선택이겠지만 이건 자신이 마시던 우물에 침 뱉지 말라는 진부한 격언으로는 표현이 너무나 부족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자신의 조국을 향해 칼을 들이대는 형국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자신의 조국을 향해 군대를 몰아간 인물은 많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대표적이다. 그가 갈리아 지방 총독으로 복무하면서 나날이 세력을 키우는 모습에 두려움을 느낀 로마 원로원은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복귀할 것을 명령하지만 그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한다. 그때 카이사르가 했던 말이 ‘주사위는 던져졌다’였다. 북방의 오랑캐를 정벌하러 갔던 이성계도 자신의 군대를 위화도에서 되돌렸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도 조국을 향해 자신의 군대와 탱크를 몰아간 반란군들이 적나라하게 등장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뛰어들었던 러시아의 용병부대장 프리고진도 전쟁터를 떠나 모스크바로 진격한 끝에 비참한 종말을 맞은 인물이다. 그나마 그들은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병력만을 움직였다는 미덕만은 지킬 줄 알았다. 그러나 장형진 고문 측은 자신들의 왕국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악랄한 약탈 자본으로 익히 소문난 MBK파트너스를 끌어들이는 무리수를 마다하지 않았다.
승자의 저주는 오래전부터 철학자들이 즐겨 다룬 주제 가운데 하나다.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가 남긴 <도덕감정론>에도 절제할 줄 몰랐던 ‘탐욕의 끝판왕’에 대한 이야기가 숱하게 등장한다. 그가 남긴 명문장은 포연이 자욱한 적대적 M&A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여전히 음미할 만하다.
역사의 기록들을 검토해 보고, 당신 자신이 경험한 범위 내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회상해 보고, 당신이 책에서 읽었거나 이야기를 들었거나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로서 자신의 개인생활에서건 사회생활에서건 극히 불행했던 모든 사람의 행위가 어떠했었는지를 주의를 기울여 고찰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그들 중 절대다수 사람의 불행은 그들이 자신의 한창 좋은 때가 언제인지, 조용히 앉아서 만족하고 쉬어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즉, 만족하고 멈추어야 할 때를 몰랐던 데 있는 것이다). 온갖 약을 복용함으로써 건강한 자신의 신체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던 어느 한 사람의 묘비(墓碑)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나의 몸은 건강했다. 나는 더욱 건강해지기를 원했다. 그리고 지금은 여기에 있다”라고.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중에서
고려아연 쟁탈전은 조만간 국회에서도 다뤄질 전망이다. 장형진 고문, 최윤범 회장,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 등이 모두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됐기 때문이다. 김병주 회장은 이미 2015년에도 MBK가 인수한 홈플러스의 구조조정 관련 문제를 따지기 위해 증인으로 채택됐지만 해외 출장을 이유로 불발된 적이 있었다. 국세청 또한 MBK가 ING생명과 코웨이 등을 매각해 대규모 양도차익을 올린 이후 탈세 혐의를 파악하고 세금을 추징한 바 있다.
자본 시장은 때로는 지극히 합리적으로 움직이는 듯하지만 수시로 격랑에 휘말린다. 특정 기업이 적대적 M&A의 타깃이 될 때는 주가 변동이 훨씬 더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대부분의 주가는 평소에는 기업의 본질 가치 혹은 내재가치보다 훨씬 더 낮은 상태로 거래되기 때문이다. 연초부터 지금껏 정부 주도의 밸류업 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는 이유 또한 국내 증시에 상장된 기업들의 주가가 터무니없이 저평가된 상태로 거래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대적 M&A에 노출되는 기업들은 지분 경쟁 이슈가 발생하면 경영권 프리미엄 때문에 적정 가치 이상으로 급격하게 치솟을 수밖에 없다. 카카오와 하이브 사이에 지분 쟁탈전이 일어났던 에스엠, 고려아연, 영풍정밀 등이 대표적이다. 아득히 솟구친 영풍정밀과 고려아연의 주가를 보노라니 고려아연 쟁탈전의 승자에게 과연 어떤 저주가 뒤따를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